(10강) 호세아 5:1-7 정조

<본문>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세아 5:1-7)

<설교>

1절을 보면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형편에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를 들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부강한 국가가 되었든 잘살게 되었든 심판의 선포 앞에서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는 그 무엇도 의지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2절을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인생은 의지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전능하시고 위엄이 있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단지 기독교가 섬기는 신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 전혀 괘념치 않습니다. 이처럼 절대자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은 인간의 교만과 완악함으로 무장하여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은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육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만큼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의지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낮아짐은 시편 22:6절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말하는 수준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상대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파악함으로써 인간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의 열심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부추겼던 모든 것들이 교만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낮아지는 자리로 끌어가지만 우상은 인간을 자아도취로 끌어갑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자신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만들고 성공과 실패의 모든 요소가 자신의 하기 나름에 달려 있다고 부추기면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힘과 열심과 공로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인간을 위한 신으로 나서는 모든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우상을 찾기를 즐겨합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해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고 있는 우상을 즐겨 찾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간에 대해 철저히 무지합니다. 오로지 힘이 되는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적당히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을 하면 인격적으로 수준 있는 인간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 자신을 포장 한다고 해도 결국 죄의 종이며 멸망의 자식일 뿐입니다. 바로 이점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항상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신앙을 들먹인다면 그것은 온통 인간의 힘과 열심과 행위를 부추기는 현장이 될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5-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 유다까지 모두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감히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양떼와 소떼를 끌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기에 그들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양떼와 소떼를 끌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시는 헛된 제물만 바치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들의 정성에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궤에만 계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나왔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제사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생명과 상관이 없는 악한 존재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자신들의 실상은 보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악함을 보지 않으니 자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볼 리가 없습니다. 이미 자신들에게 넘치고 있는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감사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정입니다. 죄는 덮어 버린 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긍휼과 자비하심을 말합니다. 도대체 인간의 죄를 덮은 채 어떻게 은혜가 나오고 긍휼과 자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신 은혜와,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이 아니라 세상의 어려운 일로부터 건져주신 사랑을 생각하고, 육신을 도우시고 잘되게 하신 은혜와 긍휼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인간을 도와주는 우상인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조입니다. 신부로서 신랑만 의지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아내로 삼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신랑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한 것이며 정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사생자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는 음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언 앞에서 인간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라며 발칵 화를 내고 달려듭니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해 온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그 모든 것이 믿음이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그 어떤 것도 믿음이라고 인정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을 말하되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한 우리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해왔지만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믿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자신의 행위를 믿음으로 연결하여 마치 여호와를 잘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라는 반발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자리끼지 낮아짐으로써 지금 나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나에게 없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고, 결국 더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만을 바라보는 음란한 마음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가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게 한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기에 이러한 착각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활동은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긍휼과 자비가 나를 생명의 자리로 옮겨놓은 놀라운 은총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자랑하고 찬양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나를 구출하신 그리스도만을 좋아하고 살아가는 이것이 정조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