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호세아 5:8-12 견책하는 날

<본문>

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호세아 5:8-12)

<설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가 없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의 운명이며 우리 역시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9절을 보면 “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견책하는 날에 이스라엘은 황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피할 수 없는 필연코 있을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황무하게 됨을 선포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에서 중요한 일은 심판에서 구출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에 불이 났다면 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급선무이듯이 세상에 심판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이들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피난처가 되시고 구원의 방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심판에서 건짐 받는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이 신자로 부름 받은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죄는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동일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서 동일하게 심판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의 심판에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게 되면 그리스도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세상의 복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그리스도부터 받은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데, 죄를 보지 않기에 은혜의 풍성을 맛보지를 못한 상태에서 다만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것으로 풍성해지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현실에 눈을 뜬다면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심판에서 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하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에만 마음이 집중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신 것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분명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고, 죄로 인해 망하는 세상의 끝을 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죄를 보지 못할 때, 회개하지 않을 때 세상과 함께 망할 자임을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길로 가신 예수님에게로 마음이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내 인생은 헛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나의 의지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앞에 황무한 이스라엘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침략으로 멸망에 처한 유다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보지 못하고 회개치 아니한 그들을 하나님이 견책하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사건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달을 때 죄인된 우리의 인생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유다를 지계표를 옮기는 자로 말합니다. 지계표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각기 숫자대로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그들이 수고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무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약자가 발생하게 되고 강자는 약자의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은 모습이며 유다의 악함이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힘있는 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꾀하고 살았던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런 유다와 에브라임에게 하나님은 좀 같고 썩이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을 때 그 운명은 이와 같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죄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자의 운명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죄 아래 있는 자신의 실체를 알고 나니까 내게 있어 희망은 오직 어둠에 있던 나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의 현실을 바라볼 때, 죄 아래 있는 나의 현실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복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이기에 그리스도를 믿어서 세상의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판 아래 남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영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전부는 그리스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