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호세아 5:13-6:3 여호와를 알자

<본문>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세아 5:13-6:3)

<설교>

하나님의 심판 때 멸망을 받을 자가 누구일까요?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 보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호 4:6절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느냐는 물음으로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자신들의 실상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의지하고 나아가야 할 분은 하나님이어야 한데도 불구하고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에브라임과 유다의 상처와 병을 낫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처로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세상의 것으로 치료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것만 있으면 모든 상처와 병이 낫게 될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이 주어진다고 해서 상처와 병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때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그 안에 행복이라는 것은 담겨 있지 않음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은 세상의 것들이 모두 헛된 것임을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낫게 할 수 없고 치료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제야 그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것이 전부였고 힘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병과 상처는 세상의 것만 있으면 다 나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했던 것들로 인하여 낭패와 실망을 당한 후에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멸망을 받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때에야 자신들이 여호와를 떠나 살았으며 여호와를 믿는 자들도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자신들은 여호와를 믿은 것도 여호와를 안 것도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여호와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여호와를 알 수 없습니다. 저마다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르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알자’라는 외침도 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말도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믿음이 있는 것으로 단정 지어 버리기에 믿음 없이 사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부터 떠나 있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셔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시고, 여호와를 알라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자는 극소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동일합니다. 속은 믿음이 아닌데 겉만 믿음인 척 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겉이 멀쩡하다고 해서 속도 멀쩡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회 잘 다닌다고 해서 속이 멀쩡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자신이 멀쩡한 자로 보인다면 그는 분명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할 자신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하늘의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고 해도 세상의 조그만 것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게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실상을 파헤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상처가 깊고 병든 자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그 상처와 병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낫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셔서 여호와께로 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라 살아가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의 실상도 보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애통함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싸매시고 낫게 하시는 분으로 계시는데 장작 멀쩡한 존재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고침 받을 수 없는 철저하게 병든 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하심과 낫게 하심을 간절히 소망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상처를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자들에게만 무한한 사랑과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는 살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다른 것에 아무리 기웃거려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를 낫게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신자에게는 헛된 것들일 뿐입니다. 헛된 것들에게 마음 뺏기지 말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가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