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호세아 6:4-1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본문>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호세아 6:4-11)

<설교>

세상이 성경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지만,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들은 세상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생소한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알지 못한 하늘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에게도 생소하게 들리고 거부감을 갖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다른 생각으로 살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도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낫설은 생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익은 말은 ‘하나님께 바치면 복 주신다’는 것이고 그것이 신에 대한 세상의 상식이기도 한데, 성경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절)는 말을 합니다.

신을 찾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성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성을 하나님께 보여주기 위해 육체적 노력과 물질적인 희생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배 참석과 종교 활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에 넘치는 헌금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나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는 것은 기존의 신관이 무너져야 하는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현대 교회는 예배드리는 것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그리고 번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헌신은 현대 교회가 신앙의 중심으로 가르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의 신앙의 형태는 자기 일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자신에게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면 신앙으로 규정해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보기에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인애를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애는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구름 같았을 뿐입니다. 아침 구름은 안개를 의미합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인애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인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인애를 베푸셨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인애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인애가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원을 위해 우상을 찾는 음란한 행위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약자에 대한 핍박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도 자비하심도 인자하심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음란한 그들을 값을 주고 다시 사셔서 여전히 아내의 자리에 있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가 마음에 있다면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이 무엇이며 지금 살아가는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인가를 밝히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애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감을 감사하게 될 것이고, 지금의 모든 것이 은혜와 사랑 때문으로 다가오게 된다면 모든 것은 짐승과 같은 존재인 자신에게는 분에 넘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신을 찾겠습니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그 속에 인애가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란히 행하는 이스라엘을 두고 인애가 없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는 의미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뭔가를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악할 뿐인데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성이라고 해봐야 모두가 나의 욕망이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내 것을 받고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애가 없는 것이고 심판의 존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을 우리에게서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제사보다는 인애를 원하시고, 번제보다는 인애를 베푸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인애가 없는 자의 제사는 제사를 근거 삼아 복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애가 있다면 나 같은 자를 살려주신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됩니다. 그럴 때 그는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에 담겨 있는 사랑과 희생과 자비를 보게 되고 애통하는 마음과 함께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7-9절을 보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에 피 흘림이 만연하고 제사장 무리가 세겜에서 살인을 합니다. 세겜은 도피성입니다. 제사장이 도피성에서 자비를 나타내야 하는데 살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자체가 묵살되어 있는 이스라엘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애가 없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러분께는 인애가 있습니까? 그것을 알려면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됩니다. 사랑과 자비입니까? 아니면 비판과 시기와 미움입니까?

인애가 없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다시한번 사랑과 자비하심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를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이런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인애가 사망에 있던 나를 붙들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