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호세아 7:1-7 인간의 실상

<본문>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저희가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세아 7:1-7)

<설교>

본문 1-2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신다는 말을 하는데, 치료해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병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에 있는 당사자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치료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며 거부할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은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설사 문제가 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하신다는 것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은 그 전부가 악한 것이고 냄새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판단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악한 것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선한 것이 많고 살만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보여 지는 것, 세상의 악이 무엇인지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자신이 병들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드러난 악은 궤사를 행하고 도적질하고 노략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악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약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가 흘리는 그 피를 기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죄를 마음에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교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뿐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다 간음하는 자인데 그것이 마치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빵을 화덕에 구워 먹었는데 화덕에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덕에는 항상 불씨를 남겨 놓았었는데 그것 때문에 불은 피워 있지 않아도 화덕은 항상 달궈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즉 불은 피워 있지 않았지만 항상 불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빵 만드는 사람이 불을 피우면 금방 피워 오르는 화덕을 이스라엘이 간음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즉 화덕의 불은 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반죽이 발교되기까지만 잠시 그쳐진 상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언제라도 피워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간의 악함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누가 마음을 통제하면서 음욕을 품는 것까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음욕을 품지 않았다면 그것은 마음에 끌리는 상대를 보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음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언제든 불이 피워지는 화덕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죄를 범할 준비를 하고 살아갑니다. 롬 3:9-18절에서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범죄 앞에서 ‘나는 너에 비해서 착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씨는 누구에게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그와 똑같은 범죄가 자신에게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6-7절에서 말하는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 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는 이것이 현재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달궈진 화덕과 같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는 달궈진 화덕처럼 죄의 씨를 갖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입술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것도 없고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도 없으면서 죄인이라 말하고 죄인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죄인인척 할 뿐이지 진심으로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자비도 머리에만 담고 있을 뿐, 은혜와 자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없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기뻐하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아닌 세상에 있는 것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치료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벌거벗은 부끄러움이 감추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입고 있는 위선의 옷을 하나님의 말씀이 낱낱이 벗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며 기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속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의 은혜는 더욱 놀라운 빛으로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