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호세아 8:1-14 선을 버린 이스라엘

<본문>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주었을지라도 이제 내가 저희를 모으리니 저희가 모든 방백의 임금의 지워 준 짐을 인하여 쇠하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지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호세아 8:1-14)

<설교>

인간을 가리켜서 ‘죄로 인해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신도 사망에 이르지만, 무엇보다도 영원한 사망, 즉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살린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 즉 하나님의 생명에 이를 수 있게 함을 뜻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세상에 보내신바 되었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이라는 운명에 있던 인간에게는 커다란 긍휼과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힘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라는 것도 모두 나를 사랑하는데 집중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은혜에 보답이 될 만한 것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긍휼과 자비하심을 감사하며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하심,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믿음을 받아서 많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자랑하고 높이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이게 된 곳입니다. 그리고 긍휼과 자비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들을 곧 천국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얘기하자고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 외에는 사실 할 말이 없는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껏 호세아서를 말씀드리면서 강조한 것이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죽음에서 생명을 경험한 자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교회에 모이는 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은 긍휼과 자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 삼아 교회와 교회 아님을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는 말을 합니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을 덮친다는 것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여호와의 집이라면 감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덮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덮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집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써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되고 죄를 덮고 자신들을 용서하는 긍휼과 자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함으로써 긍휼과 자비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과 자비가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스스로 ‘우리는 여호와의 집이다’라고 아무리 우긴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을 망할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방인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으로 일컫는 이스라엘을 덮치게 함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듯 교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는 교회이고 주님만 사랑한다고 소리쳐도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교회가 아니라고 규정함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교회의 교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소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이고 예배라는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우리는 교회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는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교회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증거는 죽은 자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넘치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살아있고 넘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긍휼과 자비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긍휼과 자비로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기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되어진 일, 지금 살아가는 것으로 감사하지 못할 때 그러한 자신에 대해 자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을 놓지 않으시고 날마다 이끌어 가시는 은혜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일 뿐입니다.

2-3절을 보면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자, 이스라엘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안다고 부르짖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 삼아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런 고통이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호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만을 두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은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긍휼과 자비가 싫어 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긍휼과 자비가 왜 싫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긍휼과 자비가 싫습니까? 좋습니까? 긍휼과 자비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합니다.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긍휼과 자비가 우리를 살리므로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긍휼과 자비로 살았으니 오직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살라고 합니다. 긍휼과 자비를 받았으니 형제를 사랑하며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가 그래도 좋습니까?

긍휼과 자비는 우리가 무너짐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무너지기를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나를 높이 세워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내가 무너짐으로써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은 거부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은 긍휼과 자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 역시 동일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라는 말은 좋지만, 긍휼과 자비가 담고 있는 그 의미와 깊은 뜻을 알았을 때 ‘그것은 긍휼과 자비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밀쳐 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즉 긍휼과 자비가 싫은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자신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위한 신,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가 관심으로 다가올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싫어서 버려버린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만든 것을 뜻합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 이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이스라엘에서 나겠습니까? 그리고 신을 이스라엘이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내고 이 신이 우리를 돕는다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하는 신을 생각하며 행하는 모든 제사는 분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자신을 위한 제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1-13절을 보면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고 말합니다.

제단을 많이 만들어도 결국 범죄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었기에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없기에 무엇을 해도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새생명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의 속 중심에는 무엇이 굳게 자리하는 것이 옳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관심이 나를 살리신 분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나를 향한 관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 나를 바라볼 때마다 죄 가운데 죽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날마다 살리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살리는구나’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가장 선한 것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이고 자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선’은 싫은 것이 아니라 기쁨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기쁨을 좇는 나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하는 것이지요. 나를 살리신 것에 관심이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