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호세아 9:10-17 옛적에는

<본문>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에브라임이 침을 입고 그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호세아 9:10-17)

<설교>

10절을 보면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는 말을 합니다.

옛적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셨을 때는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고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나고 무화과 나무에서 첫 열매를 보는 것은 기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옛적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존재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때 아담에게 하셨던 약속에(창 3:15) 이스라엘도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기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만한 민족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 7:6절부터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고 큰 나라이기 때문에 택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을 기뻐하시고 원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에 의한 생각일 뿐, 실상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기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좀 더 잘되고 싶고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11절부터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찾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어지를 원하는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하여 신을 찾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기쁨의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우상은 자기 사랑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 잘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사랑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행동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일에 잘 빠지는데요?’ 이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 제가 헌금을 적게 합니다’라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라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나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대답은 ‘그렇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하나님, 어떻게 이런 나를 사랑하십니까?’라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존재일 뿐이다’라는 것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자신을 발견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 정작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여전히 나의 입장과 나의 처지만을 앞세우면서 조그마한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쉽게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서 진심으로 믿음 없는 자가 나 자신이며 지금 당장 심판을 받고 죽어도 할 말 없는 자임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신자다움과는 거리가 먼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될 때 ‘하나님 이런 나도 사랑하십니까?’라는 외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렇다 네가 어떤 인간이든 내가 너를 택하였다는 것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에 무릎을 꿇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사랑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 쏟아질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왜 심판의 대상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증거가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벧전 4:17-19절을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증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독생자를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않으면 블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살렸다는 것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뻐하며 삽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악함을 바라보면서 나의 믿음 없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천국은 나의 행함으로 가는 나라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능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흔적이고 열매입니다. 이 흔적과 열매가 마음에 있는 신자는 우상을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에 자신을 위한 신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며 오직 그 뜻과 계획에 의해 일하실 뿐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탬이 되고 유익이 되는 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뒤 엎으시고 인간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소원을 두고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기쁨 아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