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호세아 10:1-8 두 마음

<본문>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 같으리로다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의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거품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죄 된 아웬의 산당은 패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저희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우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호세아 10:1-8)

<설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던 것들을 그리워 한 것은, 그들이 좋아하던 것들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원하고 좋아하던 것들이 광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몸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으면서도 마음은 소돔과 고모라에 붙들려 있음으로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광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고 기뻐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체험하지 못한 것을 광야에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했고, 홍해를 열어서 그들을 살리시고 애굽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으며, 하늘의 만나를 먹었으며 발이 부르트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는 인도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해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고 좋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했다면 광야에서 어떤 생활을 했든, 배가 고프든 목이 마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무엇이 중요한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만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많은 열매를 맺었음을 문제 삼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그것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맺힌 많은 열매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많은 열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풍요를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풍요롭다. 먹고 살 걱정이 없다’라는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나무의 능력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수고한 농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많은 열매로 인해 풍요로운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만약 신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많은 열매가 맺힌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풍요와 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내게 열매가 달려 있지만 내 힘으로 맺은 것이 아님을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이 많은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이것은 많은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이 있게 하신 하나님으로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것 좋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많이 있지 않을 때, 좋은 것이 없을 때는 자연 감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열매를 가지고 우상에게 제사할 제단을 많이 세우고 우상을 아름답게 꾸몄던 것입니다. 많은 열매가 우상이 복을 줘서 되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풍요롭게 한 우상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2절에서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씀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마음이 나뉜 것을 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두 개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마음이 두 개로 분리되어 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한 마음으로 세상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처럼 전혀 다른 두 마음을 속에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이 또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저희가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3절)고 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풍요로움에서 나온 인간의 악함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풍요롭다는 것을 여호와 앞에 정당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이 벌을 주셨을 것인데 이처럼 풍요롭게 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라고 말하는 것도 모든 것이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으니 왕이 날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사마리아 거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를 인하여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 영광이 떠나감이며”(5절)라는 말을 합니다.

벧아웬의 송아지는 우상을 뜻합니다. 즉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우상이 정작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전혀 힘이 되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못함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이 힘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6-8절도 같은 의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벌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의지한 것이 결국 헛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사랑 아래 붙드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돈으로도 안되는 일이 있게 하심으로써 돈도 헛된 것임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힘으로 추구하는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은총이며 기쁨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고 이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