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호세아 1:10-2:1 한 두목

<본문>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세아 1:10-2:1)

<설교>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란한 여인처럼 행했던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의 이름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긍휼을 입을 자가 아니며 오직 멸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음란함이란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음란은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사귀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되 그들 마음에는 또 다른 신, 즉 자신들을 이롭게 해줄 이방신을 마음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이러한 음란함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솔직히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한분만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역시 수많은 나를 위한 의지의 대상을 내 속에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의 음란함이 오늘 우리의 음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점을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호세아서가 이스라엘의 심판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을 받아야 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는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알 수 있으며 결국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병에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병이 생명을 위협하는 중한 병이라고 한다면 그의 관심은 자연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에 기울여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은 의원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몰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병든 자라면 모든 관심을 자신의 병에 집중하면서 의원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병든 자면서도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병들었음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기에 의원의 필요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 상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실체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보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음란한 존재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에서 건지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를 회복하여 자녀로 삼으신 자비와 긍휼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없게 됩니다. 단지 나를 용서하셨다는 이론을 기억함으로써 ‘감사’라는 단어를 머리에 두고 가끔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입술로 ‘감사’를 내뱉으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실상에서 우리의 실상이 어떠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놀라운 위로와 힘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2:1절에서도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6절에서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9절에서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는 선언을 하셨는데 바로 이어서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 받은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불의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까?

10절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입니다. 심판이 선고된 그들이 다시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된다는 회복의 선언이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약속으로 인해 심판에서 자녀라는 놀라운 반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지느냐 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헤어날 수 없는 음란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약속 때문에 무작정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우습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죄의 무리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기 위해서는 필히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풀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심으로서 죄의 사람인 우리에게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일컬으심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시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려짐으로써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아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많다는 의미로 이해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수가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과장법을 써서 말씀하셨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셀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인간의 실력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인간이 힘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심으로 성취되어진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실상을 알게 된 신자라면 자연히 그리스도 한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은 서로 분열된 관계에서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온다는 것은, 한 두목, 즉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살 수 있음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서로 적대 관계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생각으로 부딪힐 수도 있고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알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일치 될 것이고, 결국 한분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공로만 앞세우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에서는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두목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두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심판에 처한 우리를 붙들어 구출하시는 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죄인인 우리가 의지해야 할 유일하신 분이고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국 얻을 것은 실패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두목으로, 머리로 섬길 것이고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한 백성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두목을 세운다는 것이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다툼은 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기에 결국 자신을 주장하게 되는 결과로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됨을 본다면 도무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 바친 것을 내세우면서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방적으로 내밀면서 받아달라고 하고 내 정성을 봐서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철저히 도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결국 죄 없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오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아니면 백성의 자리에 머물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서로가 예수님을 한 두목으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두목으로 세웠다면 한 두목 아래서 신자는 서로 한 지체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두목만을 바라보기에 한 두목, 즉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자랑하는 자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의 맛을 알기에 긍휼과 사랑을 얘기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이것이 한 두목 아래 모여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