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호세아 11:1-12 불같은 긍휼

<본문>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세아 11:1-12)

<설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들보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에 결국 자신은 별 문제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타인의 행동에서 잘못됨이 보일 때 그것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던 자신의 들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들보는 무엇일까요?

1절에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로 여기시고 애굽에서 불러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연약할 때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여겨 애굽에서 불러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불러내서 무슨 일을 시키고자 함이 아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상태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러냄을 받는 이스라엘로서 이스라엘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을 아들로 여기시고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높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5,6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예정하시고 불러내신 뜻이 하나님이 사랑하신 독생자 아들 안에서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기준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함으로써 내게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보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범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살지 않은 모든 것이 악한 죄, 들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자체를 무시하고 살아가기에 무엇이 들보인가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무시했기에 2절에서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사 선지자를 보내서 외치시는 부름을 외면한 채 바알에게 제사하며 우상 앞에서 분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기고 분향하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악함이었던 것입니다.

3절의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도망치는 악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안아서 가르치고 고쳐 가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고치신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들을 아들답게 고치시고자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일에는 이스라엘을 품에 안으시고 걸음을 가르치고 고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무지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고치심은 결국 신자에게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이나 어려움 자체를 무조건 회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고치시는 손길로 이해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궁리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기 위한 일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고침을 받고 백성다운 신자로 새롭게 되는 것보다는 어려움이 없이 편히 사는 것을 더 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고치신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전혀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4절)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이끄셨으며 이스라엘을 목에서 멍에를 벗긴 자, 즉 종으로 대하지를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형편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는 것이 마땅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값 주고 사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붙들어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일이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외면을 받는 것입니다. 싫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말고 다른 것도 달라는 것입니다. 즉 천국과 함께 세상의 것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7절의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며 돌아오라고 외쳐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나오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는 자리가 심판의 자리며 멸망의 자리기 때문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부르심 자체가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에는 눈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는 자신이 있는 자리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머물러 살아가는 세상의 실상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구출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인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불살라진 근처의 성읍입니다. 이스라엘의 악함에 대해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멸망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여 택했다는 것 때문에 오직 긍휼로 그들을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언약이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며 은혜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고 높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이 있으면 하나님께 모든 마음을 두면서 불붙듯 하는 긍휼에 깊이 빠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라고 말씀한다고 해서 순순히 돌아가는 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거역하기만 하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날마다 찾아오시고 붙드시며 사랑의 줄로 묶어서 결국 주님에게로 이끌어 놓으시는 긍휼과 사랑 앞에서 우리의 들보가 무엇인가를 깨닫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