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호세아 11:12-12:6 하나님만 바라볼지니라

<본문>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호세아 11:12-12:6)

<설교>

인간의 숨이 끊어지기 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도 잘났다고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의 좋은 조건을 갖추어서 잘 난 자로 여겨진다고 해도 결국 죄인이라는 것으로 그의 운명과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더러운 죄인된 존재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시고 기뻐하신 그 인간이 아니기에 깨뜨려 버려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죄인 됨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갈수록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나중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까지 여겨버릴 정도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쉬지 않고 우리의 본질, 즉 죄인이라는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인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떠나 살 수 없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신자일수록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서 쉬지 않고 분출되고 있는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약을 보면 온통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심판받는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와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기쁨과 소망과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은혜의 깊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통해서 바로 나 자신의 죄의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1:12절의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는 구절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악한 실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짓과 궤휼뿐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들 속에는 자기를 위한 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나오는 것 자체가 거짓이고 궤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두고 12:1절에서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는 말로서 그들의 실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람은 헛되고 공허한 것입니다. 즉 에브라임은 헛되고 공허한 것을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에브라임은 자신들이 좇고 있는 것이 허무하고 헛된 것임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사라질 것에 불과하며 안개와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좇아 살아가지 않습니까?

성경이 세상의 헛됨을 말하는 것은 헛된 세상에 헛되지 않은 것이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로서 무엇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헛되다는 것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헛되지 않으며 영원하다는 것도 안다고 하면서 정작 좇는 것은 스스로 헛된 것으로 인정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세상이 헛됨을 알았다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한데 왜 헛된 것이라고 인정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헛됨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당장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헛된 세상의 것도 지금 당장 내가 살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 때문에 헛된 것을 좇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람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바람 말입니다. 세상이 꼭 그와 같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는 내용도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굽을 의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와 곡식을 마르게 하고 때로는 집도 무너지게 하는 동풍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보응하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야곱 같은 자도 만나주신 분임을 말합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참으로 엉망이고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임을 파헤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스라엘을 찾아오시고 만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만나로 오실만 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를 찾아오신 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다른데서 사랑을 찾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만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우리에게서는 쉴 새 없이 죄가 흘러나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고쳐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결국 심판에 이르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6절의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는 구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인애와 공의가 아니면 멸망의 존재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인애와 공의가 있습니다. 그 인애와 공의가 나타난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