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호세아 12:7-14 나는 부자라

<본문>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호세아 12:7-14)

<설교>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실상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요? 천국인 돈 많은 사람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천국은 돈 없는 가난한 자만 들어가는 곳일까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과 분량에 따라 누구에게는 돈을 많이 맡기시고 누구는 적게 맡기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고 적음이 천국을 결정짓는 조건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부자란 단순히 돈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란 자신의 소유를 가진 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소유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소유를 자신의 땀과 노력이 개입된 결과로 보기 때문에 자기 소유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소유가 적거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는 약자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은 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게 되고 소유가 적거나 없는 자는 자기 신세 한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된 자가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은 자는 소유가 힘이고 소망이기에 그리스도를 소망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소유가 없는 자도 소유가 없음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바라보기에 결국 소유에 대한 열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유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를 소망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에 힘을 두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곧 부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부자란 돈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자 되고 싶다’는 것은 돈이 있어야 내 부족이 충족되고 타인 앞에 힘 있는 자로 설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것은 의에 대한 자신의 부족을 보지 않는 것이기에 천국 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의 상태도 부자라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라고 말하는데, 상고는 상인을 의미하는 말로서 가나안을 뜻합니다.

가나안은 무역이 활발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부한 지역이었는데, 이스라엘을 상고로 표현한 것은 그들이 돈에 매인 자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 거짓저울을 가지고 속여서 사취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되와 말과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은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한 율법도 무시한 채 거짓 저울로 속인다는 것은 결국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었고,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이방인의 사고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로 부자라’는 것은 돈이 있으니 부족함이 없고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수고하여 정당하게 번 재물로서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악으로 말하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고방식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방인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9,10절)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에는 장막을 치고 거기에 거하면서 광야에서 장막생활 때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돌이키며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도록 한 것인데, 이스라엘을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에서 유리하던 그 시절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나는 부자다’는 것 때문에 무엇을 잊고 살았는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자라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돈이 자신을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들어 준다고 여겼기에 부자라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자라는 것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착각 때문에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했고, 여호와를 향한 갈급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불의한 길르앗을 낫게 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11절). 야곱 역시 불의한 자였으나 그도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12절). 13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셨는데 그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고 긍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돈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자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그것이야 말로 자비와 은혜를 무시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자신의 부족이 채워질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돈이 있음으로 자신의 부족과 비참함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자신을 살리고 있음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의에 대해 부족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의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충만 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만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