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호세아 13:9-16 하나님을 대적함

<본문>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저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호세아 13:9-16)

<설교>

시 54:4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라는 말은 여러분이 많은 들은 내용이고, 또 여러분의 현실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돕는다는 것을 현실에서 실감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원하는 도움, 내가 원하는 힘을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정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9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패망의 이유를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적하였기에 패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욕했을까요? 노골적으로 하나님 믿는 것을 거부하고 제사와 모든 의식을 폐지했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면 교회를 잘 다니는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뒤의 내용으로 알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왕과 방백들을 달라고 했던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가 지나고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영웅이 자신들의 중심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잘 이끌어 감으로 자기들도 이방나라처럼 부강하게 되기를 꿈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을 돕는 분이 계셨고 다스리는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이스라엘을 그 자리까지 나아오게 한 것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나, 가나안 거민을 물리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도와줄 능력 있는 영웅적 존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라는 도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살게 되는 도움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유도 약속의 땅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살면 그것으로 최고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 그들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 현실에서 실감도 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냥 종교적으로서 섬김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복종의 대상으로 기쁨의 근원이며 삶의 전부이신 분으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줄 능력 있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히 11: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소망하게 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의지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을 원하고 의지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날마다 우리를 돕고 계시는데 나는 현실적으로 도우심을 실감하지 못하기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세상에서 찾고 얻으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음을 깊이 깨닫는 것이고 앞으로도 여전히 하나님이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에 대해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시 33:16-22절을 보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세상이 원하고 소망하는 도움이라는 것이 전혀 도움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도움이 아닌 것입니까? 군대로, 힘으로 구원을 얻는 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건지시기 위해 도우십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입니다. 세상 제일의 갑부라고 해도 그가 가진 돈의 힘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자리이고, 제일가는 용사라고 해도 나올 수 없는 신자의 자리에 여러분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안다면, 우리에겐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힘이고 능력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반기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필요하지 않는 도움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저장해 놓으시고 때가 되면 터뜨려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사망에서 건지십니다. 14절의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누구도 사망에서 구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서 구출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사하는 그가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