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 호세아 14:1-9 돌아오라

<본문>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세아 14:1-9)

<설교>

호세아서는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게 하여, 자신들의 음란함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신들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해 무지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두터운 껍데기들을 하나씩 벗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감추기 위해 걸치고 있는 인간의 거짓된 의와 위선, 세상이 칭찬하고 높이는 영광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 즉 우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종교의식과 행위만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여겼고, 그 결과는 축복으로 다가올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하되 회개가 없고, 죄로 인한 애통함이 없고,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고 감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부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고멜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음란한 자신들의 실체를 보게 하시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를 세우신 것이고, 음란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것을 외치시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명심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교인들도 종교적 행위라는 두터운 껍데기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산다는 착각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하듯 복을 구합니다. ‘이 정도면 복을 받을만하지 않습니까?’라는 당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 오게 되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자기 의라는 두터운 껍데기에 둘려 싸여 자신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세력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무너뜨리고 속 깊이 도사린 악의 모습을 끄집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말씀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있었음을 알게 하시고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완고한 우리의 심령을 부서뜨림으로써 내 의가 아닌 하늘의 의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인 본문도 그 결론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선지자를 세워 책망하시고 고난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돌아오라는 말씀을 외면하며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고집하다가 결국 모두 패망하고 하나님에 의해 남은 자들만 겨우 돌아오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돌아오라’는 말씀은 그때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함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이 없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원하는 것은 복일 뿐, 하나님께 가는 것만이 사는 것이며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편히 살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 영생이나 마지막 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죽어 있는 상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라’는 외침이 강하게 파고들어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만이 말씀에 반응을 보일 것이고 세상의 현실과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1:3절을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들의 모습임을 실감해야 합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에서 주인을 알지 못하는 실상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신다고 해서 스스로 돌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심령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심령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할 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셨음으로 진노가 이스라엘을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진노에서 벗어난 자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자라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자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의함으로 인해 이미 엎드러진 존재들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신다거나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의미의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들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의하고 패역한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우리에게는 스스로 주님께로 돌아갈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안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받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간 자로서의 증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신자가 말씀을 가졌을 때 있게 되는 현상은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갔을 때 하게 되는 말은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있을 선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불의함을 알고 회개하는 심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침 받은 심령,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맺어진 것만을 받으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내놓는 것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수송아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을 제물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물로 드리는 입술이란 자신의 죄를 두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는 입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자는 다시는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고 말을 타지 않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연약한 고아 같은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앗수르와 같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있으면서도 긍휼의 고마움을 외면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힘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겼던 모든 것에 대해 애통해 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로서 자신의 불의함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불의함을 바라볼 때 불의한 나에게 입혀진 긍휼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과연 그와 같은 감사함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힘썼던 모든 것이 악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서는 신자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신자로 착각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그는 주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불의함으로 엎드러진 자신을 일으키고 살리시고 생명에 있게 하실 능력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알기에 주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교회도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을 살리지 못함을 알기에 주님만 기대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 돌아온 신자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는 자이고, 자신의 불의함과 죽어야 함을 인정하기에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4-8절을 보면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찌라 저희는 곡식 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찌라 내가 저를 돌아 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침 받아 주께 돌아온 성도가 누리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슬이 촉촉이 적셔 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늘 임하여 성도의 심령을 적시므로 그 심령이 항상 견고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며 열매를 얻게 되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생명의 기쁨이며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9절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모든 말씀은 세상의 지혜와 총명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침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 참된 지혜 있는 그들만이 깨달아 알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음란한 고멜 같은 우리에게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그 심령이 고침 받은 자들은 이 말씀에 의해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이 불의한 자신을 살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소망했던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