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호세아 2:2-7 그제야

<본문>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세아 2:2-7)

<설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세워서 믿음에서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행복한 가정 만들기 운동’ ‘교인배가 운동’ ‘사회정화 운동’ ‘복음화 운동’과 같은 것들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백성다운 자리로 돌이키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 어미’는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아내’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말씀임을 생각한다면 결국 ‘너희 어미와 쟁론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아내인 이스라엘과 쟁론하라는 뜻이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과 쟁론하라는 이상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어미’를 이스라엘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의미하는 이스라엘로 생각한다면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음란과 음행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음란과 음행을 보라는 의미로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내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음란과 음행을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처럼 하나님께 음행한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쟁론하라는 것은 싸우고 다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어미의 음란과 음행과 더불어 쟁론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있는 음란과 음행에 대해 더불어 싸워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음란과 음행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함께 섬긴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 이유는 5절의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연애를 자들을 따르리니’라는 말은 자신들을 사랑해 주는 신을 따랐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음란과 부끄러움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보지를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이 사랑을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사랑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들을 준다고 약속한 신이 등장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세상에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약속한 신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신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과 음행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으면서도 다른 신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들, 세상에서 힘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것을 주시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과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잘 살면 사랑을 받은 것이고, 힘들고 어렵게 살면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성경에서는 결코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하나님이기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되는 것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며 그러한 사랑을 약속한 신을 섬기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음란이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음란이고 부패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으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지를 못하고 생존에 필요한 세상 것을 제공해주는 사랑의 신을 원하는 것이야 말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음란이며 부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음란과 음행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3,4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심으로써 그동안 자기 수중에 있던 것들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벌거벗은 자처럼 되게 하셔서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과 타인의 수중에 있는 것을 비교하니 마치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외면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까? 그러나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것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인가를 안다면 하루 세끼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지금 생존해 있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6,7절)는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망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자들의 길을 가시로 막으며 담을 쌓아 갈 길을 찾지 못하게 만드시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애를 쓴다고 해도 얻을 수 없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대로 되어 지지 않는 인생을 겪으면서 인생의 주관자가 누구신가를 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이 결코 하나님이 아님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자신의 욕망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았으나 결국 원하는 것을 전혀 얻지도 찾지도 못하는 인생에서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음란과 음행에 있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섬기면 그냥 내버려두시면 될 것이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면 그렇게 살라고 놔두면 되는데 왜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아내가 음란과 음행에 빠져 있다 한들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다시 아내다운 자리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며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7절 중간의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는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제야, 즉 모든 것을 빼앗아 벌거벗은 자처럼 되게 하시고 길을 막고 담을 쌓아 얻고자 하는 것들을 전혀 얻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본 남편과 함께 했던 그때가 나았음을 돌이키며 남편에게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보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하여 세상에 나간 둘째 아들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이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막히고 수중에 있는 것을 다 잃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야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이 그냥 내어버려두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쉬운 것이 없이 풍족하게 살아가게도 하십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에서의 풍족함을 복이라고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음란과 음행 가운데 있는 아내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고 그리고 의지하는 것을 빼앗아 벌거벗은 자처럼 되게 하시고, 가고자 하는 길을 가시로 막으시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셔서 답답한 상황에 빠지게도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랑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말씀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완악하고 음란과 음행밖에 모르는 우리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로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이 우리를 신자의 자리에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내어 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신자 되게 하신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