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호세아 2:14-18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문>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세아 2:14-18)

<설교>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우기는 것일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신앙의 모양을 보면서 그럴 수가 있고, 성경에 대한 나의 지식의 여부를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모양이나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여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은 예수님이 직접 ‘이것은 신앙이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분별을 해주시는 것인데, 예수님이 지금 그런 식으로 우리는 판단하는 분이 아닌 만큼 사실 신앙을 바르게 분별하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된 신앙을 분별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또한 그들을 보면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미 자기 스스로 분별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확신’은 단단한 바위덩어리 같습니다. 무엇으로도 깨어지지 않고 설득당하지 않는 것이 자기 확신입니다. 심지어는 성경으로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이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기의 옳음으로 성경까지 바꾸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생각이 바꾸어지고 인간의 상식에 전혀 어긋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결과이며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을 날마다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바알을 참된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신이란 인간을 유익하게 하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존재라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며 이러한 상식에 의해 우상을 신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무리 성경을 근거로 해서 말한다 해도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갈 때까지 버려두셨다가 완전히 망한 뒤에 찾아가셔서 말씀하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망해서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방 나라의 포로라고 하는 밑바닥의 상태까지 버려두셨다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고생을 해봐야 정신 차린다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한 잘못된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 거친 들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실패와 어려움과 고통을 맛보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확신에 대한 잘못됨을 알게 하시고 새로운 기쁨과 소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15절에서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고 말합니다.

포도원을 준다는 것은 재물을 준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거기서’라는 것은 거친 들에서, 즉 이스라엘이 포로 되어 있는 그 상태에서 포도원을 주신다는 것인데, 포로의 몸으로 재물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기쁨과 소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도원이란 이스라엘에게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포도원을 주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인데, 그 기쁨이 바알에게서 얻고자 했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포로라고 하는 거친 들과 같은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기쁨은 무엇으로 인한 기쁨이겠습니까? 15절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는 말씀을 하는데 이 말에 신자가 누릴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수아 7:26절에 보면 아간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돌에 맞아 묻힌 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은 여리고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누구도 취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어기고 좋은 것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심판을 받은 그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는 것은, 심판에서의 소망, 즉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소망 삼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망이 아니라 여호와를 소망으로 삼는 자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에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과 감사로 노래한 것처럼 여호와께 응답한 자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로서,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대상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뻐하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소망 삼고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러한 기쁨과 감사를 알게 하시기 위해 거친 들로 밀어 붙이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6,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시는 하나님을 바알이라 일컫지 않고 내 남편이라 일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셔서 남편을 제대로 알고 섬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9-20절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에서 ‘장가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다시 장가든다는 말을 3번씩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하게 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음란한 아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결한 처녀로 여기시고 새로운 결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백성된 이스라엘과 결혼을 하실 때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입니다. 공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을 뜻하는데 공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의와 공평과 은총과 긍휼을 가지고 장가드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아예 의와 공평과 은총과 긍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의와 공변됨, 은총과 긍휼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심판으로 끌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구원으로, 은총과 긍휼로 말미암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복 받고 잘산다는 등의 말이 비록 귀에 솔깃하고 그런 하나님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바알이라 일컫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의와 공변됨으로, 은총과 긍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영원한 구원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친 들과 같은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욕망으로만 살아가는 나의 자리는 아골 골짜기가 되어야 마땅한데 그런 나에게 은총과 긍휼을 가지고 오신 바로 그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매순간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복된 인생을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또 기뻐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메마르지 않는 생수와 같은 기쁨과 감사가 쏟아져 나오는 인생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인생을 산다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돈 많은 것이 좋지 않으냐?’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생각 그대로 사도 바울을 만나보십시오. 바울이 과연 뭐라고 할까요? 예수님은 또한 뭐라고 하실까요?

23절을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김 받지 못하던 자들이고 백성이 아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은총과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알았을 때 나오게 되는 고백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같은 자를 은총과 긍휼로 말미암아 백성이라고 일컬으신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약속하고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기도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21-22). 하나님의 뜻에 의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날마다 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은총과 긍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완악함을 깨뜨리시기 위해 거친 들로 몰아내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