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호세아 3:1-5 하나님의 구속

<본문>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세아 3:1-5)

<설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이 인간을 무시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로 여겨지기 십상이기에 ‘선택’이라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에게는 천국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것이고, 천국을 가고 싶어 하고 예수를 믿고 싶어 해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면 지옥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선택’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다면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쳐 온 모든 것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된 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은 선택한 자를 기어코 구원하시는 분이라면 인간이 전도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게 될 것이고, 마음대로 죄를 짓는다고 해도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될 것이 아니냐며 뭔가 죄를 방치하는 듯 한 느낌도 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상식에 들어맞는 것은 모든 책임을 인간에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를 구원 하시는 분임을 말하면서 믿고 안 믿고의 선택과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상식과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적 상식에서 인간의 열심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여러 교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교파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은석 교회도 장로교회인데, 장로교회는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주장한 교리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주장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하는 장로교단에서도 선택을 쉽게 말하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선택을 말하게 되면 인간의 열심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성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인들이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열심을 강조해야 하고, 상급이라는 것을 끌어 들여서 열심을 낼 수밖에 없도록 다그쳐야 할 형편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과 자기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택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보내신 후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선언을 하시고, 누구든 예수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다른 예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예수는 자신을 복되게 해주는 기능으로서의 예수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런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라며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문제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복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참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사실 인기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열심만 보이면 복주겠다는 다른 예수가 더 인기가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이런 예수에게로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실 분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죽고 없는 다윗을 구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죽고 없는 다윗을 왜 구하는 것입니까?

2: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셔서 험악한 세월을 지내게 하심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의 세월을 지내면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여호와를 알았을 때 그들에게 보인 것은 자신들의 악함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악함을 보게 될 때 비로소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자신을 세상에서 복되게 해줄 은총이 아니라 악한 죄에서 건져줄 은총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 자손에게 있음을 깨달았기에 다윗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오심, 즉 다윗 자손이 오심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두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신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들을 저주에서 건지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가부터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의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를 보지 못하면서 용서를 말한들 그것은 용서에 관심도 없고 소망도 없으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용서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용서가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용서의 은총이 아니면 안 되는 자신의 악한 실상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받을만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오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열심을 내밀면서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악한 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내밀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결국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은 살인자 강도, 이런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거부한 자들에게 주어질 몫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용서의 은총보다는 세상 것에서 은총을 찾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고, 그 세상 속에 바로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을 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고 말합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값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여인이고, 값을 주고 사서 데려올 만한 가치가 없는 여인인데도 값을 치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어진 은총이고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하고 가치가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깊이를 아는 자라면 평생을 용서의 은총을 높이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란 용서와 사랑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이 자꾸 세상에 머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를 때리시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맛볼 수 있는 자리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봉사를 한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산다’는 감사의 말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고 감사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과연 맺어지는 열매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