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호세아 4:1-5 하나님의 쟁변

<본문>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호세아 4:1-5)

<설교>

사람에게는 ‘자기보호본능’이 있습니다. 가령 내가 타인에게 잔소리를 하면 그를 위한 배려이고 사랑으로 여기지만 타인이 내게 잔소리를 하면 나에 대한 간섭으로 여기는 것, 내가 마음 상한 것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심이 없고 이기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타인이 나 때문에 마음 상했다고 주장하면 속 좁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내가 잘못한 것은 그럴 수도 있는 가벼운 문제로 여기지만 타인이 잘못한 것은 믿음이 없는 큰 허물로 여기는 것 등이 ‘자기보호본능’으로 인해 나타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보호본능’은 우리의 죄에 대해 책망하는 말씀에 대해서도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악을 드러내시고 책망하십니다. 사람에게 의로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는 보지 않고 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의가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로 인정할 만한 행동을 나름대로 정하고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의의 자리에 두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보지 않고 죄만 보시는 분이냐?’라고 짜증을 내며 말씀을 전하는 자를 밀쳐내게 됩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면 그동안 힘써온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한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가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지 못한 자에게 긍휼과 자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일수도 있지만 죄인 됨을 아는 자에게 긍휼과 자비는 멸망의 자리에서 자신을 건져 준 한없는 은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천국은 좋아하면서도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자기보호본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이나 못남, 약점 등이 남에게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즉 자존심이며 이기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말합니다. 쟁변하신다는 것은 심판을 하시기 위해 죄를 밝혀내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거민과 쟁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진실이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말하는 대로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고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이는 것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악한 상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쟁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악의 실체를 알았다면 분명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쟁변하실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자신들의 죄의 실상을 알고 회개를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기 위한 쟁변이란 모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쟁변하신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악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 민족들입니까? 하나님은 이방인 민족들에게도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도 이스라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땅의 특성, 즉 은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한 것은 단지 원망과 불평, 그리고 두려움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의 땅이고, 이 땅에 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고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악은 그들을 살리고 있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고, 이러한 악에 의해서 저주와 사위 투절 이런 모습들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악에 대해 무지한 그들에 대해 쟁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을 세상이 추구하는 윤리와 도덕에서 크게 벗어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착한 행동을 하게 되면 마치 자신은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착각을 무너뜨리며 깊숙이 감춰져 있는 악을 드러내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쟁변입니다.

3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악으로 인한 결과를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이 황폐해지고 피조물에게까지 고통이 이르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4절을 보면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책망하지도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그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이 그 속에 있음을 보지 못하기에 서로가 ‘너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비난하고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다는 것은,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인데 이 제사장과 다툰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큰 위기이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우리의 죄의 실상을 바라보며 상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까? 말씀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할 때 겸손히 고개 숙이며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께 나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서 거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씀드린 ‘자기보호본능’으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함으로써 죄를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 반발하고 다툰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처할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5절을 보면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제사장의 기능은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고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제사장의 기능을 버려 버리고 선지자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버려 버린다면, 결국 이스라엘은 자연히 자신의 죄에 대해 무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5절의 말씀은 당시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런 형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도 백성들의 반발과 다툼을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주는 말을 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을 위해 살았던 것이고 그것이 곧 다함께 멸망의 길로 가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남의 이야기로 여겨집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실상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자신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자신의 죄가 드러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야 말로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기보호본능’에 불과합니다.

자기보호본능은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3:11절)는 추궁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대답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라는 것은 죄의 세력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쟁변하심으로써 내가 보지 못하는 죄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의 현실은 죄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버린 것입니다. 죄를 말하면 교인들의 마음에 불편함을 심어주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목사인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함으로써 죄를 선포해야 할 입술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 편에 서서 교인들이 듣기 좋아할 말을 꾸며대기 위해 힘을 쓰게 된 것입니다. 외치는 자 듣는 자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상을 깨닫지를 못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가에 대해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치우쳐 믿음이 아닌 다른 길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이러한 실상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마음을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가 전혀 없는 다만 악한 존재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의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악을 보지 않는 상한 심령은 없습니다. 나의 악을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나의 악을 알지 못하면서 진실과 인애가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를 원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쟁변할 때 다함께 자신의 악을 깊이 들여다보시고 상한 심령이 되어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머물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