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호세아 4:11-19 빼앗긴 마음

<본문>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저희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저희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라(호세아 4:11-19)

<설교>

신앙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해하는 신앙 문제는 오해와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신앙에 대해 어떤 오해와 오류를 발산할 수밖에 없을까요? 먼저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노력에 가능성을 가지고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필히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길만한 행함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함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의로운 자로 보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함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오해이며 오류인 것입니다.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실체는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 인간의 실체인 것입니다.

인간의 실체, 즉 악하다는 본질적인 문제는 결코 변할 수도 나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믿음이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켜서 의를 실천할 가능성이 있는 자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가능성이 없는 인간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인간은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사실 우리의 삶을 앞세우고 말씀을 대한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고, 내가 아무리 힘쓴다고 해도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갈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미 세상에 마음을 뺏긴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도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음행이라는 실제 행위와 술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음행을 하지 않고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음행과 포도주가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쾌락’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에 마음을 뺏긴 채로 살아가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거기에 마음을 뺏긴 채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분명 실천 가능한 말씀으로써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에 마음을 뺏긴 자로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음을 선포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즐거움으로 삼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종으로 붙들려 있던 애굽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광야에서는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불평에도 불구하고 물을 주시고 배를 부르게 하시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그들의 삶에 즐거움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렸고,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자비며 은혜인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증거가 음행과 포도주에 마음을 뺏긴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12절)고 말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삶에 즐거움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상을 찾아 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에 즐거움이 되는 것을 소유하는 것에 마음을 뺏겼기에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와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선지자가 최를 책망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거부하며 그들의 말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무엇에 뺏겨 있는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관심은 자신을 향해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마음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힘에 대해 포기하고 구원자를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을 증거하면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구원자를 바라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를 살게 하셨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없으면 못산다고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의 실상을 정직하게 바라보기에 돈으로도 그 어떤 권력으로도 멸망의 자리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만을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에 긍휼과 자비가 아니라 세상 것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내어 놓고, 내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심보로 하나님과 대결을 합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하나님을 이겨보겠다며 작정기도를 하고 빚을 내서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나의 정성을 봐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성을 봐주시는 하나님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를 보시고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만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심판에서 긍휼과 자비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힘으로 돈 벌고 하루 세끼 먹었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루 세끼 양식이 우리를 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살 자격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살려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끼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고 생활 할 수 있는 조건들이 주어진 것은 모두가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들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처 보지 못했던 기쁨과 즐거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막연해 합니다.

신자는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본 자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입니다. 그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면,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마음을 세상에 뺏긴 채로 살아가지 않도록 간섭하시고 때리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천국을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맛보면서 신자는 기쁨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