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버림 (사 1:1-9)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 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원두밭의 상직막 같이,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오늘부터는 이사야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가리켜서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선지자는 이사야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선지자들마다 각기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선지자는 모두가 백성들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 편을 들어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는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선지자가 있다면 그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아부하고 거짓으로 평안을 외쳤던 거짓선지자에 불과합니다.

선지자가 하는 말은 자기의 말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듣기 싫어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백성들이 아무리 듣기 싫어한다고 해도 자기가 해야 할 말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보면서 말을 바꾸거나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은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전할 때 사람들은 '너무 심하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이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인데 '그렇게까지 하면 누가 교회 나오겠느냐?'며 말을 삼갈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이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절대 예외는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안들거나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말은 무조건 배척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사야서를 공부할 것인데 먼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성경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의례히 하는 말로 여기지 말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간절히 외치고 있는 이사야의 소리로 듣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며 기뻐하는 것을 홀로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이사야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이사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양육시켰는데 그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3절에서는 짐승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소도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를 양육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양육했다고 합니다. 즉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식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깊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경에 아버지라고 하니까 부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점입니다. 이점을 생각하고 본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 안에 있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 안에 있는 자를 만드시는데 그들을 가리켜서 자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식을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되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희생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아들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홍해에서 애굽 사람은 다 죽었는데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입어서 살아났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을 가리켜서 '자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입니다. 즉 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너희 소돔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은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법은 제사, 제물, 즉 예배, 십일조, 주일성수, 봉사 이런 것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며 약속입니다. 즉 너희가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살아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서 불쌍히 여김 받고 살아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을 남기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고아와 과부가 있는 것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불쌍히 여김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니까 그것이 다 형식으로 그쳐버리게 되고 12절의 말씀대로 마당만 밟고 가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형식이고 그냥 왔다 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 사랑은 불쌍히 여기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었다면 사랑을 나눠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나눠주는 자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결국 아들된 자는 영원토록 그 피만을 증거하고 그 피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아들된 자에게서 사랑이 나눠진다면 그것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어려운 자를 단지 물질로 돕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불교에도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고 가르쳐서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을 무시했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하나님을 버린 자가 된 것이고 결국 그땅이 황무하고 파괴되는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땅이 황무해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황무함은 사랑이 없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지금은 교회가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의 사랑을 드러내느냐를 봐야합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때 그 교회는 사랑으로 번성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신 사랑을 무시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은석교회는 이 사랑으로 번성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피를 보여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아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약속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