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자 (사 5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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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채 오직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교회를 벗삼아 지내면서 버젓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겉모습이 종교적인 틀에 의해서 멋있게 치장된 사람이 아니라 그 속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에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에 붙들렸다'는 말의 의미를 종교적인 틀을 열심히 붙들고 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붙들렸다는 것은, 말씀이 지니고 있는 사상과 의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의지와 생각을 강제적으로 억누른 다음 그 인간을 말씀이 조종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로보트로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의도가 전혀 없는데 말씀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들려 산다는 것은 옛날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각들이 뒤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던 인생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허무한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이 의도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이 뒤바뀐 것이 말씀에 붙들려 살게 된 신자의 삶입니다. 즉 예전에 자기만을 생각하던 사고방식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그 삶을 추구하게 되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거듭났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선지자 사도들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말씀이 강제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전혀 후회함이 없고 오히려 기쁨으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곧 선지자들의 마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곧 사도들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의 사도들은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아까워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 사도들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복음을 증거하는데만 모든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죽더라도 예수님이 높여지고 복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의 관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는 쇠하여도 오직 예수님이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삶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된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내 한 몸이 부해지고 발전되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나는 쇠하여도 오직 예수님만 존귀하게 되고 높여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바로 말씀이 지배하고 있는 마음이고,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마음이 없이 오로지 인간의 마음 그대로, 예수님보다는 내가 더 부해지고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로 모이며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는 하나님은 분명 가짜 하나님이고 우상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다면, 내가 존귀히 되기보다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지배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어하고, 예수님의 인생을 따라가고 싶어한다면 하나님을 불러서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분명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기도이고, 따라서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자기 자신은 무너지고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 계실 뿐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심판을 아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다 무너져 버립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님께 매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고방식입니다.

우상 섬김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에 절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더 관심 두는 모든 것이 이미 우상입니다. 사 56:1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라고 말씀합니다. 공평을 지키고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평과 의는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드러내신 예수님만을 메시야로 알고 섬기지 않는 사람은 다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여호와로부터 거룩하심을 입은 자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는 분이 함께 거하는 자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사도 아니고, 교회 건축할 때 전 재산을 헌납한 장로도 아니고, 철야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입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자에게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거하시겠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성공을 원합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자식을 통해서라도 성공이 이루어지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적 시각에서의 성공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성공의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이란 돈, 명예, 권력, 이 세 가지가 포함된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것 하나라도 차지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어느 쪽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누가 성공한 사람이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는 성공자는 불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성공자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신자에게만 지존무상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재벌이 되었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마다 연초가 되면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라는 것을 열어서 목사들이 '하나님, 이 나라와 함께 하시고 대통령과 함께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없이 다만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신앙의 위장극을 펼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목사라면 아마 '하나님, 대통령의 마음이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비록 돈 없이 가난하게 살면서 무시 받고 고통받으며 산다고 해도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그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은 자기를 무너뜨린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자기 자존심이 살아있는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자존심이 다 무너지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믿고 의지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사람에게서는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자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회한다는 것은 나는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고,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결국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신자는 돈이 있다고 해서 돈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자식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식의 성공을 자랑하고 내세우지 않을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15절에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함께 하셔서 하시는 일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서 그 마음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에 함께 하셔서 끊임없이 그를 인도하시고 고쳐주실 것입니다. 자기가 무너진 겸손한 마음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가르치심에 복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고 해도 결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자기에게 닥쳐올 재앙이나 어려움을 막아주실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해도 십자가의 복음은 거부하고 자기 육신에 복음이 되는 것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불평하고 원망을 하지만,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신자는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고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고 노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풍랑 속에서도 고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독수리의 날개 속에 있는 새끼는 평화롭고 고요한 것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다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에게만 모든 관심을 두게 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자기 한 몸이 최고의 관심거리인 사람은 안정치를 못하고 평강도 없을 것입니다. 20,21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면 그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근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세상것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결국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무가치한 자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함께 하시고 고치시고 위로하시면서 결국 영원한 축복의 나라에 도달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최고의 성공자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