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식 (사 5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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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해서만큼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가면 죄수는 많은데 죄지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죄의 원인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저 사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죄는 인정한다 해도 죄의 책임을 자기에게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IMF로 인해서 경제가 어려워진 관계로 도둑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나도 예전에는 회사 잘 다니는 직장인이었는데 정치가가 나라를 이꼴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회사가 부도나고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이 짓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도둑질을 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도둑질을 하게 한 책임은 정치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가 문제였다는 시각입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교회 안에서도 팽배해져 있습니다. '나는 별 문제가 없는데 저 사람이 문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 속에서 성경을 보고 듣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를 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대개의 신자들은 '나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당신은 입술로만 주님을 부릅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그것을 인정할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가 '아니요!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회 안에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없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는 문제가 없다'는 시각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 '나는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신자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문제가 없는 자로 보기 때문에 결국 남의 문제만 보게 되고 그것을 비판하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문제투성이 신자는 바로 나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어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서로 나누는 모습이 없어서 불만이시라면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둘러 볼 때 내가 문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로 여기시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문제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없는 인간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를 찾습니다.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나는 별 문제가 없는 인간이다'는 이 생각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예배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죽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그저 우리가 하는 일들을 지켜만 보시다가 잘 안될 때 도와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살아 일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고, 형제와 나누도록 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던 금식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밥을 굶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금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밥을 안먹었다고 해서 금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된 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고 세상 것이 의지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밥을 먹되 주님을 위해서 먹고 일을 하되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금식입니다. 주리고 헐벗은 자를 대할 때도 그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들과 나누게 하고 도와주게 하는 것입니다.

사 58:9-11에 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린다는 것은, 힘없는 자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 즉 강자로서 약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는 말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한다는 것은 주린 자를 대할 때 배부른 자로서의 여유와 동정이 아니라 내가 주림 받고 있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하라는 것, 즉 주린 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한다는 것도 역시 타인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으로 여기는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며 어두움이 낯과 같이 될 것이고 여호와가 항상 인도할 것이고 물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제부터 주린 자를 볼 때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형제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으로 여기자'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신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잘 아는 자가 이 말씀을 본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이미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아닙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고 싶어하고 선을 쌓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이 남을 도와주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이 비록 남을 도운다고 해도 주린 자와 같은 심정이 될 수는 없고 괴로움을 당한 자와 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실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서 약자가 무시당하고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모두가 내 자신이 문제이기 때문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고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멍에를 메우지 않는 것은, 강자로서의 아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약자가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약자로서 약자를 바라볼 때 그에게 멍에를 메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자인 우리들에게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주린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주린 자의 심정을 동하셨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과 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믿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코 믿음에 있어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에게 내가 약자가 되어서 대하지 못하고 있고, 주린 자의 심정과 동하지 못하고 있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모든 것의 문제점을 자기에게 두고 시작하는 사람된 것이 바로 주님을 아는 자이고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그 일을 기뻐하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처지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는 참담한 처지였습니다. 약자였고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도우심으로 천국 가는 자가 되었다면 신자는 분명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랑해야 하고 약자에게 약자가 되어서 다가오신 주님의 마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되었을 때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알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자는 안식을 얻게 됩니다. 안식은 육신이 살아가는 세상 환경이 좋아지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13,14절을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단순히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오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도 자기를 위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네 길로 행치 말라는 것도 너를 위한 행동이 되지 말라는 것인데, 과연 안식일을 이같이 지킬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안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 하나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었으며, 예수님 자신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2:49).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안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안식이지 우리가 어떤 규례를 지킨다고 해서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식을 세상 것을 통해서 찾으려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 안식을 누리려고 하고, 자식을 성공 시켜서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걱정과 염려거리로 되돌아 올 뿐입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안식이 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속에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나의 본질을 아는 것이고, 이런 나를 위해서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죽으신 주님의 일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나는 문제투성이 인간이고 죽어야 할 악한 자인데 주리고 목마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돈이 최고고 돈이 힘이고 성공해야 큰소리 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웃을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만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그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이고 참된 안식입니다.

우리가 안식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지 못하고 '주여 주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뜻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안식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안식은 여러분을 영원한 안식에 있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