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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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됩니다.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세월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세월 속에서 지나간 것과 현재의 것 그리고 미래의 것에 대한 후회와 불만족과 기대와 불안이라는 것이 교차되는 삶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지나간 것, 즉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불만족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와 환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는 모두가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현재에 대해서 불만족이 있고 뭔가 채워지지 아니한 욕망이 잠재해 있을 때 인간은 그 원인을 과거를 통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지금 같이는 안되었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과거에 대해서 통한의 후회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직 오직 않은 세월, 즉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불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낳기도 합니다. 가령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 이것은 현재입니다. 그럴 때 부모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두고 '저게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 즉 앞으로 닥쳐올 운명이라는 것에 사람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결국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으로부터 안식이라는 것을 빼앗아 버리게 되고,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 평안을 찾기 위해서 뭔가 믿을 대상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신 의식'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지도 않고 신에게 기도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신이 되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넌 할 수 있어'라는 것 아닙니까? 흔히 말하는 마인드 컨트롤, 즉 자기 정신을 스스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종교자는 있다 할지라도 무신론자는 없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인간도 없는 것입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것도 결국에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환상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가 됐든, 설사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기도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생각, 말, 감정, 이런 것이 아니라 기도에 있다고 봅니다. 다른 동물도 생각은 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언어도 있고, 감정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특정적인 행동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배설물을 남겨 놓음으로서 영역을 표시하는 것은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라는 글로써 그 의사는 분명히 같은 종족인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는 현재에 대한 불만이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후회하지도 않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함을 가지지도 않을뿐더러 환상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과 환상이 없다면 자연히 기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로지 탐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에는 욕구 충족이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이것이 세상 기도의 목적입니다. 비록 신의 이름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내 기도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 기독교의 기도라는 것도 거의 모두가 이러한 범주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기도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 58:9절에 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부를 때 응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경구절은 참으로 기도에 대해서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사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고 어리석고 탐욕으로 일관하고 있는 목사 아닌 목사들은 성경의 그럴듯한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엉터리 말을 유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성을 보태야 한다고 하면서 지극한 정성이 깃들인 기도를 위해서 금식 기도, 철야 기도 또는 특별 새벽기도 등을 강조하고 나아가서 헌금까지 강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정성을 보고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 58:9절에서 부를 때에 응답하시고 여기 있다라고 하신다는 것도 6,7절에 해당하는 인간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금식을 이야기할 때 봤던 구절이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은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는 인간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었지만 이것을 간단하게 다시 설명을 하면, 약자에게서 약자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주님은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이 능력이나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분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약자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전체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이란 세상에서 떠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두고 계셨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에게 두고 사셨던 분이 예수님인 것이고 바로 그분을 우리가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몸은 세상에 살지만 마음은 세상에서 떠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같이 약자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에 떠났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힘에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힘있는 강자에게 굴복하고 힘없는 약자는 압제하고 멍에를 씌우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빈민을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모습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상을 떠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하시고 여기 있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를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벌어지게 했고, 우리의 죄가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죄있는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죄있는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죄있는 자에게서 나올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북돋아 주고 조장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 58:6.7절에 반대된 모습은 모두가 죄가 됩니다. 세상의 힘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히 힘으로서 힘없는 자를 누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약자로 오신 예수님을 누르는 것이고 힘에 죽어 가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나에게 돈이 없을 때, 자식이 못나 보일 때, 일이 실패했을 때, 그 마음이 불만과 불안과 염려로 채워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는 그동안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큰 소리치던 교회들, 신자들의 거짓된 모습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 있고 일이 잘되어 갈 때는 넉넉함 가운데서 얼마든지 주님에게 마음을 두는 척 했었지만, 경제가 어려워짐으로 인해서 결국 사랑했던 것은 돈이었고 세상의 넉넉함이었다는 것이 발각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타인이 해를 입고 피를 흘리게 되는 것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기도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죄인 것입니다.

3-8절까지의 모든 말씀이 죄악에 찌들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손에 손가락에 입술에 혀에 발에 그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부정하신다면,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면 결국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것이 죄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철칙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셔서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고 도와줄 능력이 없어서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를 죄가 가리고 있는 이상 네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동조자가 아닙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면 세상은 그 기도 때문에 피를 흘리고 해를 입을 자가 속출할 것인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가령 우산을 파는 사람이 비오기를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되면 비가 오면 피해를 입는 양산 장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3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우리의 손에 피가 있고,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지고,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혀가 악독을 발하는 모든 것도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 뜻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여호와를 기뻐하는 금식의 삶이라면, 우리 역시 그 삶에 순종되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곧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본성과 반대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롬 8:26절의 말씀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의 기도가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뜻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되어지도록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를 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이 그 신자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뜻이 포기된 신자의 기도는 현재 처한 형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현 상황을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하신 일로 생각하고 그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이미 자기가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져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조장하는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단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은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는 도구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 뜻이 포기되어지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그리스도안에서 기도하는 것이고, 이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고 있는 죄가 없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될 때 여러분은 안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