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자 (사 5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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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거나 많이 듣는 말에 대해서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주 듣고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한 말이냐'이기 때문에 신자는 항상 자신의 한 말을 되새기면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고, 또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했는지에 대해서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않으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허공만 울리는 공허한 말로 그쳐버릴 것입니다.

그 한 예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자'라는 말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고 또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의 진실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던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 의미를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만약 대답할 말이 궁색하시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동행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동행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하면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호신이지 결코 동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비록 살아 계시지만 보이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와 직접 함께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함께 하시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인물이 나오면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인물처럼 하는 것이 곧 동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둘입니다. 하나는 에녹이고 하나는 노아입니다. 물론 이 두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했고 나머지는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녹과 노아에게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을 쓴 것인데, 그 이유는 에녹과 노아같이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에녹은 홍수전의 사람이고 노아는 홍수 후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은 홍수 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르치고 있고 노아는 홍수후의 사람들에게 동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과 노아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유다서 1:14-15를 보면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계시 받고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심판을 계시 받고 방주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심판을 계시 받고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나 노아가 심판에 대해서 예언을 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았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자신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동행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나 사도들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예언을 했던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행을 한다고 할 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즐겁지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끼리는 즐거움은커녕 괴로운 법입니다. 속히 갈라지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동행이란 다만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을 향한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 때문에 더러워진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신자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죄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가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죄를 좇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좇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한가지 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는 그 마음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자신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회개라고 하고,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9-1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죄에 빠져 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로 오시는데 그 모습은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고, 구원을 투구로 삼으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신 모습입니다. 호심경이란 갑옷을 의미하고 보수라는 것은 복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8절에서도 그들의 행위를 갚으시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 하시고,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공평이 멀리 있고 의가 없습니다. 온통 어둠과 캄캄한데서 행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팽개쳐지고 공평이 물리쳐집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의로운 중재자, 즉 구속자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구속자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대의 모습으로 옵니다. 그리고 오셔서 하는 일은 행위대로 갚으시는 것이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보응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에 대해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어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싫어하신다면 나도 세상이 싫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면 나도 역시 죄가 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반대로 오히려 세상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이 더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친해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과 친해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공격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굴복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미워하시는 예수님 앞에 굴복한다는 것은 나도 역시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러분에게 과연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세상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무시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고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그런 의도가 있습니다. 있다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는 자이고 죄를 미워한다면 죄에서 떠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와 상관없이 죄를 떠난 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속자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20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구속자는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시온과 죄과를 떠난 자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온이란 죄과에서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구속자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맨 먼저 전파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고, 그 죄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자기 백성'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과연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없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물론 사랑한다거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했다고 해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속자는 죄과에서 떠난 자에게 임한다고 하셨는데 죄에서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옹호하고 죄의 길을 쫓아가고 죄를 좋아하면서 믿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구속자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시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죄를 미워하고 죄에 동조하지 않고 죄에서 떠난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시온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구속자가 임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