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발하라 (사 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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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죄짓고 난 인간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복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의식에서 나오는 구호들이 '하면 된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되 실패는 없다'라는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구호들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서 나약한 인간이 아닌 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강한 자를 필요로 합니다. 나약한 자는 국력에 손상을 줄뿐입니다.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강인한 의식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두려움이 없이 어떤 일에든 뛰어들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상입니다. 이러한 요구 앞에 '하나님만 의지하자'는 것은 약해빠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를 돕는 분이시지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까지 이런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힘으로 실현하고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이 말이 더 믿음이 있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자'라는 말과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사는 길이다'라는 말과 어느 것이 더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말입니까? 전자의 말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린 할 수 있다 실천하자'는 말 자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부추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는 말은 스스로의 힘을 포기하도록 하는 말이기 때문에 불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이게 하는 것이 곧 사단이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둠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빌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한다는 것은 '나는 내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 앞세운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문제가 하나 생겨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입장을 더 생각하고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까? 결국 인간이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자기의 뜻에 부합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경을 보기 때문에 모든 말씀들이 내가 실천해야 할 말들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도 그런 사고방식에 많이 인용된 구절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청년회 헌신예배나 행사시에 많이 사용되는 표어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청년들이여 왜 나태에 빠져 있는가? 왜 할 일을 못하고 있는가? 세상을 보라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어두운 것은 청년들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이여 일어나라 그리고 어둔 세상에 빛을 발하라' 이런 말을 외칠 때 '아멘' 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래 이제부터 내가 빛을 발하는 생활을 해야지'라고 결심을 안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행사는 행사로 그쳐버리고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 소위 교회 행사가 아닙니까?

본문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빠져 나와서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하나님이 일어나라고 한다고 해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판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징벌하실 때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면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간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탈바꿈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버린 인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없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인간' 이것을 다른 말로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죽어 있는 인간에게 '일어나라'고 외친다고 해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또 빛을 발하라고 하는데,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내가 곧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빛으로 살아라'고 하지만 교회에서 말하는 빛의 수준은 단지 이웃을 돕고 착한 일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빛은 교회가 아닌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수준의 빛으로서 세상이 변화된다면 이 세상은 이미 예전에 변화가 되었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59장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59장에서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가려져 있는 것은 죄때문이라고 합니다(2절). 그리고 이 세상은 온통 죄로 가득찬 어둠의 세상임을 말합니다(9,10절). 그러한 세상에 구속자가 오시는데, 구속자의 할 일은 행위대로 갚으시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18절). 그러나 그 속에서도 구속자가 임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시온이고 야곱의 죄과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20절). 즉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구속자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난 죄가 무엇입니까? 사59장에 나온 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공의가 없고, 진리가 없고,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거짓을 말하고, 악독을 발하고, 죄악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시고,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시고, 죄인을 가까이 하심으로서 세상의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요 1:4,5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빛이 어둠의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빛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은 빛으로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드러내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때문에 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장차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높이실 것을 미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 빛이 옴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빛이 온다고 해서 어둠이 자신의 어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느냐 입니다.

우리가 곧 어둠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내가 곧 어둠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가 신자이고 예수님을 만난 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하고 싶어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신비한 현상을 기대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분을 만난다는 것도 역시 신비한 기적 같은 체험을 통해서 만나질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기보다는 신비한 이적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탐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탐욕으로 살기 때문에 꿈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나는 꿈에서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말없는 말 보태서 간증이라는 것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눈에 넘어진 자국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봤다고 하면서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온 세계에 배포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어떤 신비한 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내가 곧 어둠이고 내가 곧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입니다. 이것이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자의 특징입니다. 빛을 만났기 때문에 어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들이 빛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저 좋은 일하면 그것을 빛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빛은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 어둠의 세상을 심판하시고야 말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빛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어둠에 지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습니까? 빛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의 것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것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고 야곱의 죄과 중에 떠난 자에게 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모든 사람에게 빛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엡 5: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빛이 임한 자는 내가 바로 죽은 자였고 잠자는 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자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도 신앙적인 행위를 많이 한 것 때문에 '나는 깨어있는 자고 살아있는 자다'고 생각했었는데, 빛이 내게 임하고 보니까 '내가 바로 죽은 자였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빛이 임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죽은 자다'는 것을 무시하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칭찬을 받고,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고 사람 좋고 인격도 있고 착하다는 높임을 받을 때 내가 죽은 자임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성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미 빛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빛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어둠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다만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훌륭하신 분으로만 인식할 뿐입니다.

빛이 임한 자가 빛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이 임한 자는 과거에 내가 붙들고 있었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은 다 어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빛을 알았기 때문에 어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9,20절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빛을 아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빛이 되셔서, 내가 만들어 낸 영광 말고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 되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둠의 세상에 이러한 사람이 적습니다.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모두가 어둠을 붙들고 살면서 빛을 빛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속에서 빛이 임한 자는 내가 죽은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로 깨어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세상의 모든 것은 어둠입니다. 우리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여러분의 빛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빛을 아는 자로 살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아는 신자는 어둠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알고 그 빛에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삶을 살뿐입니다. 3절에서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는 말씀처럼 빛이 임한 자는 빛을 가까이 하고 빛으로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