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자 (사 6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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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을 해야 그 책망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 못하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는 책망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고 책망을 한다면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책망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책망하는 상대방을 향하여 공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해서 거의 인정을 하지 않고 반발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서로의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젊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문화일 뿐인데,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잘못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서로가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인간과의 시각차이가 엄청납니다.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을 인간 편에서는 전혀 죄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인간은 전혀 동화될 수 없는 첨예하게 대립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는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을 인간의 인격 수양을 위한 좋은 말로 가득차 있는 경전으로 여깁니다. 실제로 모든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경전이라는 것이 이런 범주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인격 수양을 위한 좋은 말로 가득차있는 경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편에서는 전혀 죄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인간의 첨예한 대립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대립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 서서 성경을 성경대로 말하는 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성경을 성경대로 전하는 자에게서 참된 성경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반응을 철저한 대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한 대로 인간 편에서 도저히 죄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성경에서 지적하는 죄가 진실된 것이라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은 인간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생각해 본다면, 성경이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자기 백성 찾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고자 해도 일단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에서 건짐 받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예수님 편에서 아무리 죄에서 건져놔도 또 다시 죄의 악한 자리로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무엇에서부터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는지 조차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경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을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겠다고 나서는지, 바로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사야서를 생각하면 이사야서가 왜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책망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말씀한 대로 짐승들도 자기 주인은 아는데, 이스라엘은 주인을 모른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순순히 인정을 하겠습니까? 물론 당시 이스라엘이 드리라는 제사도 안드리고 제물도 바치지 않고 계명도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들 멋대로 살고 있었다면 이러한 책망에 양심이 찔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철저하게 절기를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제물도 바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고, 하나님도 역시 자기들의 그러한 행위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희는 주인을 모른다'고 한다면 순순히 '예 맞습니다. 우리는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나설 인간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비도 이스라엘이 인정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고 시비를 걸고 있으니 여기에서 대립이 발생할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시비를 걸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도구로서 이사야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야 자신부터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를 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보좌에 앉으신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된 자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청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향할 때 그 마음의 자세는 '세상에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나자 이사야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 어떤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하며 망하게 된 인간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난 이사야가 과연 이스라엘에게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부지런한 종교행위를 칭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그들이 인정하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신랄한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지런한 자기들의 종교행위를 보고 신앙에 대해서는 안심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안심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신의 종교행위입니다. 종교 행위에 부지런할 때 누구든지 신앙에 대해서 안심을 하고 게으를 때 불안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 종교생활에 게을러서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부지런한 종교생활을 바라보면서 신앙에 안심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러한 죄에 대한 개념을 자신의 종교생활에 심취해있는 이스라엘이 이해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의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하면 왕, 즉 고난을 받는 여호와의 종이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하늘로 갔을 때, 거기서 여호와의 신이 와서 그 의를 남은 자에게 주시고, 여호와의 신이 임한 남은 자는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봉사자로 살아가면서 어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여호와의 종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인데 이 계획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너희란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남은 자가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일컬음을 받는 것이지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되었다고 제사장이 아니고, 장로로 안수 받았다고 봉사자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여호와의 신이 와서 의를 주시는 자는 남은 자입니다. 오직 남은 자에게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의 의를 주시고 그 사람을 가리켜서 제사장, 봉사자라고 일컫는다는 것이 이사야의 말이고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인간이 산에 틀어 박혀서 성령 달라고 금식기도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의가 주어진다면 의를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은자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남은 자가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아무나 남은 자라고 할 수 없고, 교회 일에 부지런하다고 남은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을 하면서 친다는 것은 애당초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다면 이스라엘이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돌아오라고 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책망 받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손에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선지자의 길을 간 분이 예수님입니다.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유대인에 의해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 기대하시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주여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무릎 꿇고 나서는 자는 찾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죄를 드러냄으로서 그속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고 하늘에서 의로 오실 여호와의 종을 기다리는 그 자가 바로 남은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은 자의 특징은, 세상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보람으로 삼고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을 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반면에, 남은 자들은 '내가 바로 주님을 창으로 찔러 죽인 죄인의 괴수인데 죄인의 괴수가 뭘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될 수 있는가? 나는 뭘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이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뭘 하든 안하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늘의 의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은자이고, 남은 자들이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황폐하고 무너진 곳이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황폐해졌다는 것은 성전이 황폐해지고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짐은 결국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철저해보고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의해서 그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힘으로도 의에 대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 큰 예배당을 지어바치고 많은 수의 교인을 끌어 모으는 것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지막때에 영생에 들어가는데 그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발버둥을 쳐도 의에 대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고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신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하나님 편에서 성공으로 바꾸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봐야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만 섬기기를 힘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희생하시고 피흘리신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희생하시고 피흘리시고 일하신 결과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영광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고, 봉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봉사자는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만 드러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봉사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입니다. 따라서 '주여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자기를 부정하게 된 사람이 남은 자이고, 이 남은 자가 바로 하나님의 봉사자이며, 이 남은 자가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성전을 하나님 편에서 다시 세우시겠다는 계획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보겠다는 발상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봉사자로 어둠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는 것은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8절에 보면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언약은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10절)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한몸입니다. 깨어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영원토록 깨어지지 않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남은 자들의 장래 모습입니다.

신부는 오직 신랑만 의지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신랑이 있기에 세상이 어렵다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신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은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봉사자로 일컬음 받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과연 오늘을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깊이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