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를 발하심 (사 5:24-30)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같고 차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문명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환경과 문명에 길들여지면 그것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30평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방한칸 짜리 셋방을 사는 사람을 보면서 '나보고 저렇게 살라고 하면 하루도 못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0평이란 환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차가 없으면 불편해서 살 수 없을 것같고 걷는 것은 아예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나, 컴퓨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손으로 글쓰는 것을 불편해 하는 모든 것이 환경과 문명에 길들여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들여진 인간들이 더 나은 환경을 원하게 되고, 더 좋은 문명을 누리면서 보다 좋은 질적인 삶을 누리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원이라는 형태로 자리하게 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갖가지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를 찾아가서 비는 사람들이 있고, 조상에게 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오늘 같으면 97년 1월 1일에 뜨는 해는 어떤 특별한 새로움을 담고 뜬다는 착각아래 동해안의 바다를 찾아서 해돋이를 보면서 한해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질세라 가세를 합니다. 즉 신년 축복성회라는 열면서 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물론 소원을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얼마든지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소원이 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 아닌 것을 복으로 말하면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은 극히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신자는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갈까'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더 편하게, 좀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아갈까에만 관심을 두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들이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귀찮은 일로 되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급한 것이 아니고 내 사정이 더 급한 문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갈급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이고, 있으면 있는대로 그것 가지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이래저래 하나님은 뒷전이고 말씀은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임과 동시에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5장에서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맺혔다고 합니다. 그 들포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시니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호의호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노를 발하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복은 8절에 있는 대로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야 살든 죽든 관심 없고 자기 한몸 있는 재산 가지고 한평생을 편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복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이유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 주셨다고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서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돈을 가지고 집사고 땅사고 술마시는데 써버린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있는 자들의 그런 욕심 때문에 고통을 받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자들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가난한 자는 더욱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눈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덮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 받을 죄였던 것입니다.

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로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라는 것은 전혀 성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복을 생각하기를 내 창고가 차고 넘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하나님이 내 창고를 채우셨으니까 이것은 모두 내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것이고 내 복이라는 것을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말 3:10). 하나님의 창고에 양식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했고, 하나님이 창고의 양식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위한 창고인 것입니다. 그 양식이 곧 우리들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십일조 했으니까 이젠 됐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유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느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주셨는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것이 나누어져서 누구에게로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들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치라고 말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노를 발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노를 발하시는 이유는 단지 화풀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25절에 보면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노를 누가 받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자리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실패한 우리들에게 떨어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내 손에 쥐어진 것을 의지하며 살았고, 하나님을 믿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우리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의 복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져 있는데도 살기 어렵다고 탄식이고, 한숨입니까? 죽을 때까지 병에 걸리지 않고, 돈걱정 안하고 사는 것이 복입니까? 그래봐야 지옥 가는 인생이라면 몇십년 편하게 사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부럽습니까? 주님의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복을 복으로 여기는 신자라면 어떤 형편에서도 이렇게나마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은 여러분에게 있는 욕심이 깨어버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기쁨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