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5-19 유린당하는 성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세상 어느 인간도 자신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합니다. 말에 대해서 반발할 분이 계신다면 지금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한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대로 실행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누군가로부터 기분 나쁜 말을 들었을 사람들은 말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기분 나쁜 말이 머리 속에 남아있을 결국 마음 상하고 괴로움을 겪는 쪽은 자신이기 때문에 기분 나쁜 말을 잊어버림으로서 마음 상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구원이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들렸던 말이 내가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입니까? 자신의 귀에 들린 말을, ‘이것은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니까 잊어버리자라고 한다고 해서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이럴 수만 있다면, 자신이 자신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있을 것입니다.

기분 나쁜 , 마음 상하게 , 자존심을 상하게 ,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 이러한 말이 들려오면 즉시 잊어버리고 오로지 칭찬과 들어서 기분 좋은 말만 기억하고 산다면 누구와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가운데 말도 안되는 말이 많이 있지만 중에 하나가 누군가를 향해서 실컷 말을 해놓고는지금까지 내가 중에서 기분 나쁘게 말이 있거든 잊어버리고 유익된 말만 기억해라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우리가 흔히들 사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는 따로 있습니다. 존재는사탄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서 예로 들었던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기분 나쁜 말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분 나쁘다는 감정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무시 받기 싫어하는 본성에서기분 나쁨 발생하는 것입니다.

최초의기분 나쁨 가인에게서 찾아볼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데서 무시당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무시당함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본래의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탄에 의해서 죄에 빠진 인간에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선악을 알게 인간이 선악에 대한 규정을 자신을 중심으로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자신이 무시당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를 악으로 규정하고 분노하게 되고 기분 나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자제하고 조절해 보려고 해도 한번 마음 상함은 풀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진 인간이 자신을 기준으로 선악을 규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복음도 자신의 선악기준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복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연히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이고, 복음 역시 자신을 축복하기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더러움을 고발하는 복음의 참된 역할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고발하는 위치에 있는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있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변화되었다’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변화나 거듭남은 도덕이나 윤리적, 또는 인격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 인격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중심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자기가 기준 되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선악 개념에 의해서 행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세대 계층에 따라 도덕과 윤리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자신을 기준으로 사고방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 내용은 대적에 의해서 주의 성소가 유린당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굽어 살펴달라는 것입니다.

15 말씀에 보면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굽어 살펴달라 말은 흔히 생각하기를 하늘에 있는 신이 나의 처지를 돌아봐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에게 굽어 살펴달라고 의미는내가 지금 어렵고 힘든 처지에 빠졌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올 있도록 도와달라 의미가굽어 살펴달라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굽어 살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도 아니고 자기 가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성소가 대적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굽어 살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계속해서 보면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도 주의 성소를 향한 열성과 행동이지 우리 개인의 삶을 향한 열성도 행동도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만 열성을 보이시고 행동을 하시는 분이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자기를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인간을 향한 열성과 행동으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은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성과 행동을 인간을 향한 것으로 생각해 버리니까, 결국우리하기 나름이다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열심을 보시고 우리에게 열성으로 다가오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게을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성도 행동도 있을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교회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은 교회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호응하시고 열성과 행동으로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무지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장 먼저 버려야 생각은, 우리 교회가 일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축복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우리가 하는 일은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말을 것이지 인간의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일을 하나님이 일로 바꾸어 버린다면, 일에 동참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구실을 씌워서 믿음이 적은 자로 치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가 하고 있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거나, 공동체 의식이 없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등의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의 일에 불려 나와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우린 다만 거기에 도구로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쓰여지는 도구라는 것은 스스로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것이 일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우리를 불러서 일을 해나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일입니까?’라고 하나님의 일은 성경을 통해서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일해오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일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가령 교회 건축을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일이 구약 때부터 등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지은 것을 가지고 교회 건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무너지고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성전이 새롭게 등장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건축은 하나님의 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중요시하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무너뜨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세워진 예배당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주의 성소가 유린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신자다운 모습이라 있습니다. 그럴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있습니다. 도구에게는 자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핑계 대고 자기 일을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는 억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선지자가 기도하고 있는 것은,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5)입니다.

선지자가 굽어 살펴 달라고 하는 것은 주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대하는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도 유린당하는 주의 성소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서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소 지키는 것입니다.

성소는 성막입니다. 성막에서는 흠없는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어감으로서 부정한 자의 사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성막을 세우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일어나는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성소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성소에 계셨고 이스라엘은 성소로 나옴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소가 무너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피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음을 호소하면서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이 있기를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을 지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금 피의 정신으로 살아갈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지가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성소는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예수님이 성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성소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는 성소인 우리가 대적에 의해서 유린당하는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있습니다.

성소가 유린됨은 성소에서 벌어지는 제사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도 성전 건물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성전에서 행해지는 피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가 유린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하신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바된 자로서 피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 이것이야말로 성소를 유린하는 것입니다. ‘나는 흠없는 어린양의 때문에 공짜로 영생을 얻은 자다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소를 지키는 것인데, 여전히 자기 사랑과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진 못한 인간으로서 주님의 피의 은혜를 내세우기보다는 못난 존재에 지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내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피로 이루어진 성소를 스스로 유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흘려 사신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소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이 성소로서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룩한 처소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우리 속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서 끊어지지 못한 옛사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사람인 내가 성소의 대적이 되어서 성소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의 피로 사신 성소가 옛사람인 나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주의 길에서 떠나고 주를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지 말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소가 굳게 세워지고 지켜지는 , 이것이 이사야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심정에 서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는가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의 피로 사신 성소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성소를 유린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주의 피로 사신 몸이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를 내세워 그리스도의 피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이러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이사야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열성과 능하신 행동으로 우리를 치셔서라도 성소를 곧게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몸의 편함보다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이 귀함을 알기 때문에 나를 쳐서라도 성소를 굳게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인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사랑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으로 인해서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성전을 지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