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 (사 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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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근심과 걱정거리가 많은 세상살이입니다. 한숨 쉴 일이 끊이지 않고 가슴을 치며 슬퍼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인생입니다. 기뻐하고 춤출 수 있는 일들보다는 눈물 흘리며 애타할 일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면서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발버둥 쳐보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세상의 굴레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근심과 염려에 둘러싸인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묶이고 세상에 대한 한을 가슴에 쌓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니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더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부르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마음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집착에서 부를 뿐입니다. 내 인생만 도와준다면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노라는 거짓 맹세까지 해가면서 하나님을 불러 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탄식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교회부터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모인다고 하는 교회라는 집단들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고 있고 창조주라고 부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허수아비 신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자기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여러분이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게 한 그 중심에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입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돈 되는 것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즉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향한 여러분의 탐욕이 숨어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신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크신 여호와로 자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싫고 좋은 것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나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하게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말로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고, 위대하시고, 크신 여호와라는 미사어구만 갖다 붙이면 뭐합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이 내뱉고 있는 침발린 말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누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인생이 기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인생을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을 세워놓고 보면, 인간은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먼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고 흙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뭐 그리 귀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흙을 재료로 해서 만든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을 하겠습니까? 물론 흙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아끼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귀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치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 피조물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분명 인간은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죄를 지음으로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단지 흙일뿐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창조주에 비하면 먼지 같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지고 안개며 풀의 꽃과 같은 존재가 다만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를 크게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크게 바라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근심, 걱정이 함께 커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이게 큰 병이면 어떻하나'라는 걱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병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병에 대한 근심 걱정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죽는 것이 당연하고 병 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병이 걸리면 '하나님, 죄인인 제가 병에 걸리지 않고 지금껏 건강하게 지내온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병을 죄인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분명 걱정 근심도 함께 작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병 걸리는 것이 당연한 존재'라는 시각으로 보지 않고 '건강해야 해'라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히 병에 대한 걱정근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크게 보는 것과 작게 보는 것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작게 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시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먼지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놀라운 말씀으로 대하게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결코 말씀에 대한 소홀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결코 말씀에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과 자기 인생과 자기 탐욕에 빠진 채 살아갈 뿐입니다. 마치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라는 말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붙잡기 위한 삶에 치우칠 뿐입니다. 하나님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부르고 붙잡으려고 할뿐이지 결코 말씀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현재 여러분은 여러분이 부르고 있고 붙잡고자 하는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 계시된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찾는 하나님은 절대로 엉터리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을 부르고 있고 그분을 의지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섣불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하려고 하지 말고 다시금 말씀을 통해서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참된 여호와를 부르고 있는가?'라는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라고 말하고,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이렇게 두 번 나오는데,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의 이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주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말이나 '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의 모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만약 그렇게되면 사도행전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예수'라는 이름을 부름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특정 단어나 특정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불렀다고 해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와 주의 이름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현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란 하나님입니다. 우린 보통 '주'라고 하면 예수님을 연상하지만 구약 때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는 것과, 주를 부르는 자가 없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제사 드리면서 여호와를 불렀고, 제물을 바치고 십일조를 하면서도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바라본 현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사야는 '여호와'를 불렀다고 해도 그것을 주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도 이미 구약 때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 하나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주를 부르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주의 이름이란 단지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주의 모든 뜻과 의도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즉 주가 있고 주의 이름이 있다면 주의 이름에는 주의 뜻과 모든 의도가 다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의 뜻과 주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가운데서 부르는 부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제사하면서도 제물이 흘리는 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외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여호와'를 불렀다고 해도 제사에 담겨진 하나님의 듯을 외면하고, 율법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외면해 버린 이상, 그것은 주를 부른 것이지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이 땅에 와서 오직 주의 뜻과 주의 일이 무엇인가만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와 주의 이름이 어떻게 다른가라고 할 때,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 시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분명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일인 것으로 여겨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 그대로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그리고 '하나님' '예수'라는 이름을 수없이 불려지고 있지만, '주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일로 여겨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 역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자기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십자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5,6절에 보면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 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이스라엘의 현실은, 주는 의를 행하는 자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는데 그러한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진노 아래 있고 도무지 구원 얻을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은 부정하고 인간이 내세우는 의도 다 더러운 것이며 잎사귀 같은 존재이고 항상 죄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죄로 인하여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 즉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주를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가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동일한 시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부정한자로 더러운 자로 잎사귀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피를 보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작 제물을 잡고 피는 흘려지고 있지만, 그 피가 자신에게 필요하며, 자신은 흠없는 제물의 피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치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피의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가장 귀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인간을 바라본 것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정한 자로, 나의 모든 의는 다 더러운 것으로, 나는 쇠패한 잎사귀에 지나지 않은 존재로, 나는 죄악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도 없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전부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를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구원을 얻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자신을 높게 보지 마시고 크게 보지 마시고 부정한 자 더러운 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자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죄로 가득한 더러움의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 자신을 작은 자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마음에서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신 주의 이름이 불려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