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관계 (사 6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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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범하는 실수는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세상이 창조되고 인간이 창조되어진 것은 인간의 요청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생각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형성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어떻게 지어졌든, 또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든,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답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처음의 상태만 그대로 유지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의 환경과 처지에 대해서 자기 요구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현재 나의 처지와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고 있는가에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자연히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살펴주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도해주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자식과 아버지, 진흙과 토기장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말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기를 좋아합니다. 진흙과 토기장이, 피조물과 창조주, 또는 9절에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라는 말과 같이 백성과 왕으로 보기보다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기를 즐겨합니다. 그 이유는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펴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따뜻하고 사랑이 있는 관계로 연상되기 때문에 신자를 도와주고 힘을 주고 편한 길로 인도해주는 아버지 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상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이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결코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의미하는 4가지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보면 자식에 의해서 아버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서 자식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진흙을 선택해서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고, 창조주에 의해서 피조물이 만들어지고, 왕에 의해서 백성들이 유지됩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져서 하나님의 일에 초대되어진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해서 자기들의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관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되고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닥치면 자신의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잘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참 신자의 모습을 찾아야 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쉬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등장하는 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에 요나서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흔히 요나서를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게 회개하게 하는 성경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도망을 치다가 물고기 뱃속에 삼키는 벌을 받은 것같이 하나님이 선교사로 가라고 할 때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역시 전혀 성경과 상관없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나서에 대해서 차근차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인 니느웨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요나는 명령을 어기고 배를 타고 다시스라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멀리 도망을 쳐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의 명령과도 상관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성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닐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는 것이 귀찮고 하나님도 싫고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와 단절되면 하나님과도 단절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요나의 관계는 요나가 도망친다고 해서 끊어지고 멀어지는 관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나를 선택하셨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 역시 우리가 신자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 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 쪽에서 단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나오지 않고 도망을 친다고 해서도 하나님 편에서 만드신 관계는 결코 포기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된 우리에게는 놀라운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도망을 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하자 선장은 신에게 죄지은 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요나가 바다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삼키우게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셨으니만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 내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요나가 알았다면 이방인인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 것이지 이방 민족에게 구원은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을 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면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불렀을지언정 제사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몰랐습니다. 제물이 흘리는 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그냥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만 부르면 다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예배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진심으로 부정한 자로 바라보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을 부정한 자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깨끗한 자요 마땅히 구원받을 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서 제사 드리고 제물만 바치면 다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오해였고, 이러한 오해는 지금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만 부르면 신자로서 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 그대로이고, 또 요나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는 관계는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끊어지는 관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에는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단절될 것으로 여기고 불안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두 번째 명령이 주어집니다. 욘3:1-5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외치라고 명령한 것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말을 외치면서 이제는 40일만 지나면 니느웨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할 결과가 일어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본 요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욘 4:1을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햇빛이 비칠 때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을 요나가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벌레를 보내서 박넝쿨을 시들어 버리게 했을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성명을 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기르지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넝쿨을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큰 성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여명이고 육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아끼시고 생각하시는 나라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회개하는 나라라는 것을 요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사랑과 은혜의 차원에서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끼시고 생각하시는 나라는 항상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나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한 자, 더러운 옷, 쇠패한 잎사귀로 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라를 아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니느웨를 도구로 삼아서 요나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은혜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버림받고 무너져야 마땅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항상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을 인식할 수밖에 없고 언제나 죄에 대한 회개로서 하나님 앞에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알았기에 9절에서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12절에서도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한 성이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고 성전이 다 불에 타버린 그 지경을 당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관계이지 이스라엘이 잘하고 못하고를 가지고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식이고 진흙이고 피조물이며 백성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지금'입니다. '어제 잘 믿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조금 잘한 것 같은 행동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진심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토기장이로, 창조주로, 왕으로 바라보는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과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늘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