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한 백성 (사 65:1-7)

99030710113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 행위를 헤아리고 그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들이 추측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들 멋대로 '이렇게 하면 천국 가겠지' '이런 사람이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코다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인간이 세운 기준에 의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의해서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운 기준을 따라가는 것은 오히려 천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모든 판단과 기준을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진실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거룩하고 깨끗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을 한다는 것은 결국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습성 때문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속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강조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잘 속고 살아갑니다. 속으면서도 속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자기가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나오는 사람 치고 '하나님을 모른다' '예수를 안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 '없다'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합니까? 백이면 백 모두가 '자기 행위'입니다. 기도든 성경 읽기든 헌금을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연관된 행위를 많이 할 때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행위가 소극적이거나 없을 때는 '믿음이 없다'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린 보통 내 마음은 내가 잘 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도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도를 진실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헌금을 하고 나서도 '나는 헌금한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헌금을 진실 되고 믿음이 있는 헌금으로 평가합니다. 그 누구도 '나는 더러운 마음으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자기를 자기가 믿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결국 '내 마음 + 행위 = 믿음'이라는 공식아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했다'는 이 생각이 자신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된 마음이란 자기가 부인된 마음입니다. 자기가 부인된 마음이 자기 행위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자는 천국 역시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생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때에 모든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따라서 나 스스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고 확신했는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우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고 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항상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내가 한 행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성경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부딪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신앙생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다는 열의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되면,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가?'라는 것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하나님이 노를 일으키시고 보응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대하면서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노를 일으키신다. 이것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이 뭔가? 기도를 적게 한 것인가? 성경 보는 것을 게을리한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노를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대책을 마련하게 되고, 그 대책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노와 보응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생각을 좇아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 65:2-3을 보면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사람을 패역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 패역한 백성이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데, 성경을 꼭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분에게만 관심을 둘 때 이해되어집니다. 자기 신앙에도 관심 두지 않고, 교회에도 관심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관심 둘 때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뭘 해도 교회를 위해서 하게 되어있고,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신앙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즉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연히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안하는 것 자체를 신앙생활의 퇴보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만 관심 둘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백성은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하나님과 신자는 은혜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요나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요나는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도망을 칩니다. 흔히 자기 신앙생활에 의해서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잘못하면 멀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의 신앙생활,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에 의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생활하면 하나님과 가깝게 있는 것이고, 기도생활에 게으르면 멀어지는 것으로 여고 스스로 낙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생각이고,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로 행하는 패역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인간편에서 아무리 도망을 치고 죄가운데 있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놓지 않고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1절의 말씀은 애당초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했던 자들이 하나님께 관심을 두게 되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아니했는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스스로 찾아오신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아서 지금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자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고, 그 결과는 지옥 가는 것이었는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구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결과이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은혜 때문이지, 우리들이 기도한 결과도 아니고 성경을 읽었기 때문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를 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안보면 믿음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결국 '패역한 백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들이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내 멋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유지된다면 은혜만 붙들면 되는데, 왜 '내가 기도하는가? 성경을 부지런히 보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까? 은혜를 안다면 자연히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가 나오게 되고, 은혜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성경을 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롬 8장에 보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하고, 또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성령님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들의 교회생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믿음이 떨어져서 그렇다느니, 신앙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졌다느니'라는 생각에 빠져서 낙심을 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기도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이 좋은 교회를 만들도록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요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중에 15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일을 안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세상에 남겨놓은 성도들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나왔다면 그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내 생각만 하면서 내 멋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언젠가 부터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서 나를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로 나오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를 붙드시고 지켜주시는 은혜의 결과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잊고 산다면 그 자는 단연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불선한 길을 행하던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보응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 덕분에 보응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그 피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기도하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깨달으셨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교회 일도 아니고 내 신앙생활도 아니고 오직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을 때, 여러분이 가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고 하면서 자기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다. 즉 자연히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산다면, 나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기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 생각대로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패역한 백성이고 노를 일으키는 자에 지나지 않는 나를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날마다 감사만 하고 살아가란 말이냐?'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예수님을 믿는 자로 바라보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식상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내 멋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을 하신다면 날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보게 되면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거룩과 비거룩으로 구분하는 습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5절에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고 말씀한대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는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을 보면 구분이 나오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행동을 보기 때문에 '이 교회가 저 교회보다 낫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낫다'는 구분을 하게 되고, 5절에서는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자기 행동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