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자 (사 65:8-16)

990314111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용서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피해를 입은 자가 피해를 입힌 자를 향해서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그 어떤 문제도 삼지 않겠다는 것이 곧 용서입니다. 따라서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를 대신해서 용서해주겠다고 나설 수는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 자격은 오로지 피해를 입은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피해자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서 피해를 입으신 것이 있으시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으시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용서한단 말입니까?

신자인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용서받은 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단지 '용서해달라'는 말만 남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용서 전문가'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잊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용서를 말하면서도 우리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것이 뭐냐?'라고 반문을 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미안한 마음도 없고 부끄러운 마음도 없이 당당함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형식적으로만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들이 대부분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 새벽기도를 못나옵니다' '하나님 지난 주일에 예배를 빼먹었습니다' '하나님 십일조 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 제가 아무개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런 종류의 내용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질문을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그 피해 입은 것에 대해서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새벽기도 못나오는 것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새벽기도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를 입은 것이 뭔가?'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용서를 구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십일조를 안낸 것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를 입은 것이 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새벽 기도를 안하거나 십일조를 안한 것 등의 내용을 가지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회개를 하시려거든 얼마든지 하십시오. 그러나 '과연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느냐?'를 알고서 회개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자들의 회개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죄를 알고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이 회개하기 위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회개를 위한 회개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징계를 피해보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고, 십일조 안하고, 주일 안지킨 것 때문에 하나님이 벌주는 것은 아닌가?'하는 조바심과 불안감에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을 피하기 위해서 미리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도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담겨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주님의 피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는 자에게만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자기 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둔 회개는 이미 회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패역한 백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패역한 백성을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한 자'(2절)로 말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 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선한 길로 행한다는 것은, 내 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을 열심히 함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들이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할 때, 하나님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시를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잘 봐주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패역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시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심판하시고 보응 하십니다. 누구도 심판과 보응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피할 수 없는 심판과 보응 속에서 살아남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너진 은혜 속에서 새롭게 꽃피우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열매를 거둘 때 썩은 포도는 버리지만 썩지 않고 즙을 간직하고 있는 포도는 잘 보관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썩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 즙을 그대로 간직한 열매를 찾을 때 그 열매는 소중히 보존을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과 보응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존재가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남은자라고 말합니다.

9절에 보면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씨를 내며'라고 말하고,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낸다'고 하고, '나의 택한 자가 그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씨, 기업을 얻을 자, 하나님의 택한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9절 마지막에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고 한 말씀을 보면 9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자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었는데, 하나님의 종들이 그 기업에 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에서 살아남을 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는자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습니까? 그것은 심판과 보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이 택한 자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보응에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택한 자를 의지하는 것임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택한 자 안에서 생명을 얻을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택한자이신 예수님을 앞세우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택한 자를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따로 택한 자를 만들어서 그것을 앞세우고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열심히만 섬겨주면 좋아하실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예수를 만들어 세워놓고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해서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전혀 기쁨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기뻐하신 아들을 기뻐하고 그 아들만 의지하고 나오는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지를 않고, 하나님이 말씀해도 듣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음성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듣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도 아닌 것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응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처럼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한 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교회 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은혜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가장 기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모이는 그 무리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져온 수송아지와 수염소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이 바친 제물, 제사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예배, 내가 드린 헌금, 내가 한 착한 행동을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1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즐겨하지 아니한 일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예배나 기도나 성경 읽는 것 착한 일 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렇다면 예배도 드리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고 착한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려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우기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도 기도할 수 있고, 예수 없이도 헌금하고 착한 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속에 예수님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피를 말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갈수록 자신에게 매이게 되고 결국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티를 선한 행동을 하고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오직 그 마음이 예수님의 은혜로만 채워진 사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나도 다 떠나서 오직 은혜만 내미는 사람이 마지막 때 살아남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