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사 65: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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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커지는 것' '많아지는 것'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낮아지고 적어지는 것은 저주나 재앙으로 생각합니다. 복과 저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종교, 인종, 환경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비록 믿는 신은 다르고 교리도 다르고 종교 의식도 다르지만 복에 대한 개념만큼은 일치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종교, 인종,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모든 인간의 출발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 출발점은 '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종교가 다르고 인종, 성격, 국가가 다르다고 해도 죄는 똑같습니다. 죄가 똑같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현재보다 더 발전되고 번성하고 나아진 환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자기 목표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고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 즉 현재 자신보다 좀 더 능력 있고 힘있는 인간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였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항상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욕구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자연히 자기 발전과 번성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인 천국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하는 것들이 풍족하게 주어질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그러한 복으로 충만한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결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 불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만족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부족한 것이 없고 좋은 것으로 가득찬 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만족이 없다면 기쁨과 감사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천국은 인간이 변화되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욕심이 없는 인간으로 들어간다. 그러기 때문에 불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인간이 욕심을 가진 채 천국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바라보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더 가지고 싶어하거나 더 높아지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에게 무엇이 얼마가 주어져 있든지 부족을 느끼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이 없는 천국에 '무엇이 있다 없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흔히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고 할 때 그 상을 남보다 더 많고 귀한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욕심이 없는 곳이고 있다 없다라는 개념도 없는 천국에서 남보다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천국을 '살기 좋은 나라' '부족한 것이 없고 내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찬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죄에서 출발된 세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항상 세상을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음껏 누려보지 못하는 불만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찬 천국'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나쁜 습성은 복을 기대할 줄만 알았지 주어진 복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지고 채워진 것에 대해서는 복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불만이고 불평입니다. 세상을 잊고 살려고 해야하는데 오히려 세상에 깊이 빠져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을 물리쳐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에 대해서 '천국은 세상을 다 잊어버린 곳이다'라는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17절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데 그 때가 되면 이전 것, 즉 지금의 세상은 기억하지도 않고 마음에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졌던 마음 상함과 상처들, 염려와 근심거리였던 것들, 미워하고 시기했던 모든 것들, 그런 세상에 대한 기억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용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용서란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를 입은 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그냥 덮어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천국에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 되고, 자신이 피해를 입은 사실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억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만으로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채워진 천국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절에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는 말씀을 보면 장수를 말합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백세에 죽는 것을 아이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백세가 못되서 죽은 것은 저주 받았기 때문에 일찍 죽은 것처럼 여길 정도로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2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자기 손으로 지은 집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살 것이고, 자기 손으로 농사 지은 것은 자기 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25절에 보면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은 흙을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천국도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아도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 채 오래 사는 것을 원합니다. 또 지금은 자기 손으로 번 것은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고, 이리가 양과 함께 먹든지 말든지 사자가 짚을 먹고 살든 말든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히 8: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 즉 세상의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18,19절에서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예루살렘도 하늘의 예루살렘의 모형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모형은 실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땅에 있는 것을 실제로 여기면 안됩니다. 땅에 있는 것은 장차 하늘에서 살아갈 삶의 정신과 원리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의 복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원리를 그대로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는 수준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애통하는 것이고, 온유한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약속한 복은 재물이 채워지는 것이고 높임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높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같이 빛나는 존재로 변화되고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통해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는 세상에서 높임 받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심으로서 이루어질 새 나라에서의 영광과 영화를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지 그것이 실제 우리가 누릴 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복의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행하는 일에 복을 주고 잘되게 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복은 우리가 하는 일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일을 잘해서 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이 하신 행동이 우리에게 복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말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거나 소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복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다가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머리와 마음에 세상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왔다고 해도 세상을 잊어버리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근심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고스란히 마음에 안고 나옵니다. 돈 걱정, 자식 걱정,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말씀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당장 내 마음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우리 하는 일에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지 '천국으로 인도한다'거나 '예수님이 하신 일에 복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은 현재 자신의 형편과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천국 이야기는 자기 마음에 멀어질 수밖에 없고 현실적인 문제에만 귀가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세상을 잊지 못하고 항상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진 채 살아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근심과 걱정거리를 하나님이 덜어주기만을 원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요즘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날 염려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합니까?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기도할 것입니다. 남들은 다 쫓겨나도 나만큼은 쫓겨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남을 누르고서라도 나는 살아야 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은 강자가 살아남는 원리와 원칙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은 강자와 약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25절의 말씀입니다.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내가 살고 내가 농사 지은 것이 내 입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당시 이방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았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힘에 의해서 눌림 받고 살았던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강자와 약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질 천국이라면,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에게서 바로 이러한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려고 하는데,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도 천국 같은 교회를 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교회로 모임으로서 다른 형제들에게 천국을 보여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심령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을 담고서 모이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