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사 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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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신자는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항상 긴장감과 심각함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버릴 만큼 중대한 문제가 있다면 과연 그것을 소홀히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문제는 하나의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신앙생활이란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종교를 하나 선택해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단지 교회를 다니는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교회를 다니는 정도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즉 신앙생활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 덜미를 붙잡힌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친구에게 붙들려서 다닐 수도 있고, 부모님 때문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또 내 스스로 좋아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 덜미를 붙들린 상태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그 마음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신앙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중요한 인생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대한 인생 문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들을 중요한 자기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단지 자기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인생문제 때문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인 저는 바로 그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마지막때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인생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분명 제가 드리는 말씀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고, 신앙이란 세상의 인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는 생각으로 나오셨다면 분명 제 말은 중대한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다시 한번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긴장감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과연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점검을 하시고, 만약 내가 가는 이 길이 바른 신앙의 길이고 생명이 주어지는 길이라는 어떤 힘든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결코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3절에 보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라고 말씀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난처한 점은 기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목사에게 상당히 난처한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완전히 묵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의 정성을 전혀 받아주시지 않고 인정하시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방법은 제사이며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자각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 신자임을 자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의식에 온갖 정성과 열심을 포함시키기에 몰두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관심을 두고 몰두했던 부분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의식에다가 자기들의 신앙과 정성을 집어넣어서 예배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즉 의식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거나 영광 돌릴 수 없음을 모른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제사하고 제물을 잡으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소를 잡아서 바치는 것은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어린 양으로 제사하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은 것과 같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의식에 차이를 두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아실 것입니다. 분명히 골 3: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탐심이 없는 인간이 있습니까? 그리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까? 모두가 우상을 섬기고 있고 죄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인데 그런 우리를 이스라엘과 구별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제사나 오늘 우리들의 예배에는 전혀 차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과 연관지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복을 기대하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에 치우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온통 복을 외치다 보니까 노골적으로 복을 외치는 교회에 대해서 반발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구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으로,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차원 높은 신앙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복을 기대하고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할뿐이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헌금과 예배 행위에 대해서 정당성과 의로움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옳은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복과 연결 지어서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외칠 때 '나는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은 옳은 신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기대하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정당성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복을 기대하지 않고 한다고 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가 복을 기대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제사와 절기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제사와 절기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17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선행을 배우는 것이고, 공의를 구하는 것이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제사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약한 자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나 제사라는 것은 물질이나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예배라고 하고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복을 기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고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별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복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살기 힘들고 병들어 고생할 때 그러한 고생에서 벗어나기를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복을 기대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의 잘못된 점은 나의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복을 기대하지 않는 그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약자로 바라보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뺏긴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믿음, 정성, 사랑, 이런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 뺏겨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내것인 줄 알았는데 믿음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내 믿음 가지고 예배하고 내 믿음 가지고 헌금하고 내 믿음 가지고 봉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예배하게 했고 헌금하게 했고 봉사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믿음을 하나님께 뺏겨 버린 상태입니다. 믿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내 믿음'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을 자랑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약자입니다. 사랑 역시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려야 합니다.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약자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겨 버린 상태의 사람이 약자이고, 그 마음을 가리켜서 가난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런 신자를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합니다. 권고하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면서 끝까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2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이고 이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심령에 통회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마치 바람이 가득찬 풍선에 바람이 모두 빠져 나가버리는 것 같이,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빨려 나가버리는 경험을 한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힘을 빼앗아 가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말씀에 두려워 떠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자기들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고 합니다. 세상 모두가 다 하나님 아래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집을 짓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하나님 아래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그런데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의식과, 특정한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것으로, 자기 힘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고 멸망의 모습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소위 우리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했던 신앙생활이란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찾지 못하고 단지 우리 식으로 예배드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할뿐입니다. 저는 지금 예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어떤 식으로 바꾸든 상관없이 우리들의 마음이 약자의 마음이 아니라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예배가 되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인 모습에 속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빼앗긴 자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서 말씀에 떨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바른 삶이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고 마지막 때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흔적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