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 (사 6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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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거나 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거나 영광 돌리고 싶어하는 그 말에는 시비 걸 이유가 없지만,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 돌리겠다는 분들에게 분명하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쏟고 있는 수많은 노력과 정성들이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참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교인으로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이라는 이름 석자를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면 얼마든지 그런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느냐?'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되어진 참된 하나님인가?'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옳은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교회를 다닌 것과 다니지 않은 것, 봉사를 많이 한 것과 많이 하지 않은 것, 이런 것으로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진짜와 가짜의 여부가 판명됩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을 교회를 위해서 살고 교회를 다녀 놓고도 지옥 가는 불상사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을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엄포를 놓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들이 수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쌓았던 교회의 연륜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의지할 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수십년 세월을 교회를 다녔고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일했던 자기의 연륜을 믿고 의지할 것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연륜을 믿어버리면 절대로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십자가인데, 정작 자신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믿은 기준을 자신의 신앙연륜에 둬버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녔을수록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사인데, 장로인데, 교회를 수십년 다녔는데, 십일조 잘하는데, 봉사 열심히 하는데, 기도 많이 하는데, 성경 100번 통독했는데, 이러한 수식어들이 여러분의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기 몸에 치렁치렁 장식품을 달고 나오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를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자기 몸에 달려 있는 여러 가지 장식품들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은 다 떼어 내버리고 오직 한가지, '하나님, 나는 더러운 자입니다'라는 그것 하나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것까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 것으로도 자기 자신을 가리지 않고 투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발견되어지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 교회들의 모습은 이러한 과정은 속성으로 마쳐버리거나 기본적인 사항으로 인식하고 건너 뛰어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으로 그쳐버립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 정도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여겨버립니다. 진심으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까지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앎입니다.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인식한다면 분명히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성전을 지어 바치고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물론 제사 제물 등이 섬김이 되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나 제물 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은 애초에 갖기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묵살해 버린 채,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 '십일조 하면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말로서 교인들을 미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종교 장사꾼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의 종교 상식을 통해서 답을 내리려고 하지 말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7-9절을 보면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자식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세상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 중에 아이를 낳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남자는 노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 그 어떤 인간도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구로라는 말은 고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또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즉 시온이 고통과 상관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을 겪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잉태케 하셨고 하나님이 해산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낳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낳은 자식은 고통 속에서 나온 자식이고,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잉태하게 해서 해산하게 한 자식이 있는데, 이들은 고통과 상관없이 낳은 자식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고통과 상관없이 낳았다는 것은 죄와 상관없는 자식이라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세상의 인간은 둘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자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바로 나를 낳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단지 자녀로서 받을 혜택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자녀로서 받아 누릴 것에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녀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아버지께 기쁨이 되는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아버지께 기쁨이 되어 드리려는 마음도 없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도 없이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노리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 이전에 자녀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순종했는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내 멋대로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젖으로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젖을 먹이시고 키우시고 지키십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낳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이를 정성껏 먹이고 입히면서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낳아서 기를 때 부모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자식이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를 젖으로 먹이시고 키우실 때 그 기쁨은 자녀가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존재할 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광 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식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자기 하고싶은 대로하면서 살아가고 싶지만, 나를 낳아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키워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을 자제하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자식의 옳은 태도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도 역시 내 마음대로 하면서 세상을 살고 싶고 내 기쁨과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반대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쫓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진짜 신자,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의지하는 자녀된 자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10절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이,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려면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항상 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힘쓰십시오. 나를 먼저 생각해 버리면 나를 우선으로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가 안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잘못을 알게 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손은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하는 손이고 사랑의 손이며 동시에 잘못됨을 징계하는 징계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에게는 오직 진노의 손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지는 자녀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산다는 것이 무척 부담되는 일이고 고통이 되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내 기쁨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조건이 달라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세상의 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렸고 또 그러한 기쁨을 원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이 자녀 되게 하신 자라면 분명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님을 아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멸망의 세계에서 나를 자녀로 낳아주셔서 하늘을 소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와 사랑을 아신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기쁨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