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판 (사 66: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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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산다는 문제를 굳이 구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로 사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행함'이라는 면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없이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사는 것을 구별하여 말씀 드리는 것은, 현대 교인들이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많은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던가,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다던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신 분이다는 것을 믿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면 그것을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는 분명 믿는 자는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일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산다면 믿음의 모습이 삶에서 그대로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삶에서 보여져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마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삶에서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믿음 없이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 자신들뿐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다가도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금방 마음이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의 실체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연약한 인간이 자기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은 항상 내 몸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빨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으로 산다고 자부했고 말씀에 굳게 서 있다고 자신했는데 막상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연약한가가 드러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날마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나의 연약함까지 강하신 예수님께 맡겨 버릴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있으며,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믿음을 소유해서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강한 힘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필연코 그 힘을 의지하게 되고 힘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를 원하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강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없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 필요에 의해서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상황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약함을 보이는 것을 아주 자존심 상해합니다. 항상 남들에게 강한 자로 보여지기를 원하고 힘있는 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믿음이 강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지 믿음이 약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연약하다'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 말을 이해한다고 해도 아마 부족을 고백하면 하나님이 강함으로 채우신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한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강한 믿음'인 것입니다.

강한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강한 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강한 힘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힘없음과 약함을 솔직히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약함을 드러내고 강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선악 논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선악 기준이 있습니다. 인간의 선악 기준으로 본다면 약한 믿음보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자를 더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 자신의 약함을 알고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5-17)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가를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돼지고기를 먹는 자, 가증한 것을 먹는 자, 쥐를 먹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늘에서 불을 타고 내려와서 심판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 가운데 쥐를 먹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먹을 것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는 상황이라면 쥐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쥐를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먹습니다. 그렇다면 돼지고기를 먹고사는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왜 먹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음식에 대한 법이 있습니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먹어도 되는 것은 정결한 것이라고 하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음식을 구별하십니까?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이 나오는데, 네발 달린 짐승을 구분할 때는 되새김하는 것과 굽이 갈라진 것은 정결한 것이고, 이 둘 중에 하나라도 위배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되새김하는 것은 한번 들어갔다고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새김입니다. 그리고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의로운 자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되새김을 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돼지고기를 먹는 자, 가증한 것을 먹는 자, 쥐를 먹는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돼지고기를 먹고 구약에 더러운 짐승으로 구분한 것을 먹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돼지라는 짐승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증하고 더럽다는 것은 세상과 밀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곤충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땅에서 뛰어 오르는 곤충입니다. 그러나 땅에 기어다니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도 역시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먹고 살아가는 것은 가증한 것으로 여깁니다. 물고기도 진흙에 묻혀 살아가는 것, 즉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밀착되어 살아가는 것은 가증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구분하신 율법 속에 장차 오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시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세상과 밀착되고 세상의 사고방식에 혼합되어 살아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문제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교회에서만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자는 심판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과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역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판의 기준을 세우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고전 16:22의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주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가 심판의 기준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까 아니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 모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선악 기준을 자신의 착한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착한 행위를 의로 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착한 행위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심판 받을 모습입니다.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세상 법칙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누가 주를 사랑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한 대로 주를 사랑한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도둑질하고, 교회도 잘 안나오고,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는 그런 사람들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알고 나니까 바로 나 때문에 주님이 못박히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이 못박히신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나는 고백이 마음 깊이 우러날 때 그것이 주와 함께 못박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사는 자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의는 철저히 사라져야 하고, 내 의가 죽어버린 그 상태가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세상과 구별된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약함과 더러움을 모르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을 향하여 떨어집니다.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연약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누가 세상사고방식을 교회로 끌고 들어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 힘을 다해서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고 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지를 잊지 말고, 이것을 삶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