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열방으로 (사 66: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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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인들이 기도할 때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저희 교회와 함께 해주시고'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마치 '함께 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닌 것으로 여기기라도 하듯이 이을 모아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목사가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도 '하나님 이 가정에 함께 하시고'라는 기도를 빼놓지 않고 합니다. 개인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저희 가정에 함께 하시고'라는 말을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는 사업에 함께 해달라고 하고, 길을 떠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오고가는 발걸음을 지켜주시고'라고 하고, 차를 타면 '운전사에게 함께 하시고'라는 기도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는 기도의 문제점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상투적으로 내뱉는 식의 기도를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기도 잘함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할 때가 많습니다. 은석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은석교회가 부흥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사업에 함께 하시면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정에 함께 하시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 신자라고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들이 추측해서 마음대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린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민족을 통해서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함께 하셨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복을 누리고 부강하고 강대한 나라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더군다나 그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가 여러 나라도 아니고 오직 유일하게 하나인데, 그 하나를 심판하시고 멸망해 버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심판과 멸망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되지 아니한 다른 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전세계에 '이스라엘처럼 하면 너희도 심판과 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조차 가차없이 버리시고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라면 선택하지 아니했던 민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융통성 없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인데도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면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셨는데 그들이 이방인으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받으면서 고생을 하고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결과를 맞이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복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말씀에서 어긋나고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길을 가게 되면 가차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역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이 믿고 있었던 하나님을 우리가 수입해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 보이신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뜻입니다. 고려대에서 철학을 강의했던 김용옥이라는 분은 '우리나라에 신이 없어서 외국에서 신을 수입해다가 믿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에서 수입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그분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과 말씀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길을 걸어간다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처럼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계해서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에서의 '함께 하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다면 '아하 이것이 바로 심판 받는 자의 모습이구나'를 알아야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면 '이것이 바로 버림받는 자의 모습이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이러한 얘기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데, 21절에 보면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 중에서 택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중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이방인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뭔가 고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제사장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레위인만이 담당할 수 있는 고정적인 직책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레위 지파 외에 다른 지파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 제사장이라는 직책인데, 그것이 이방인에게 옮겨진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레위인만이 제사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법으로 말씀하셨을 때, 혈통으로서의 레위인을 지칭하고 그 레위인에게 제사장을 고정시켰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신 법을 무너뜨리고 무시하는 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제사장을 맡김으로서 제사장이 무엇이고 진정한 레위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에서 벗어나자 레위인과 제사장을 이방인에게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제사장에서 버림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알아야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인가?'를 우리가 알고 우리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고자 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소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일 예배에 빠지고, 봉사 안하고, 십일조 안하고, 기도 안하고, 성경보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큰 죄로 여기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은 그런 의식과 행함에는 철저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 빠져도 괜찮고 봉사 안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를 빠졌으면 빠졌다는 행위를 보지 말고 왜 빠졌는지 그 사상을 보자는 것입니다. 봉사를 안했으면 왜 안했는지 그 사상을 봐야 합니다. 기도를 안했으면 왜 안했는지 그 사상을 봐야 합니다. 반대로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해도 결국 그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보신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생각으로 했느냐는 보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물건을 먹고 쥐를 먹는 자를 망하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 말씀을 18절과 연결시켜 보면 결국 부정한 것을 먹는 것은 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입니까?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상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보인 사상, 즉 세상 사고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서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고방식이고 악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웃을 세상의 것으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악한 사상에서 떠난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도 금식도 모두가 약한 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약자가 있게 하신 것도 역시 이스라엘이 과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악한 사상에서 벗어났느냐를 확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며 이사야 지적했던 이스라엘의 악한 사상,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죄는 무엇입니까? 사 1:16,17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또 23절에서는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악한 사상은 세상과 똑같이 외모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 예쁘고 돈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힘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힘에 의해서 약자들이 무시 받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시고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은 철저하게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심판 받고 버림받을 이스라엘의 소위와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방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은 단지 제사 드리는 의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같이 죄인이고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고 하면서 어떤 일을 맡은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과 제사장직이라는 것이 '죄인'임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삼는 자리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레위인으로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우리는 죄인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부정하고 더러운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레위인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의 사람들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자랑하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자기 함으로 삼고 과시해 버린다면, 옛날 이스라엘이 가졌던 악한 사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그렇다면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줄 자를 찾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버리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만 드러내며 살아갈 자를 찾으십니다. 2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깨끗한 그릇에 예물을 담아서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줄 알았던 제사, 예물 드리는 것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하나님께 드리게 된 예물은 재물이나 짐승이 아니라 사람 자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님은 참된 예물로서 사람 자체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은 다른데 있고 단지 예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림으로서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즉 죄인 됨을 보여주는 인간 자체를 예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거나 우리들의 시간이나 노력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행하는 행동들이 나의 죄를 덮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참된 신자의 모습이며, 우리를 이러한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스라엘의 자리에 집어넣으시고 레위인,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만약 우리가 옛날 이스라엘 같이 악한 사상으로서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심판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이 왜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으로 옮겨졌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옛날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볼 때 목사를 '성직'이라는 미명 아래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사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도 역시 죄인이고 망해야 할 악한자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있는 것인데 오히려 목사를 일반 성도와 다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목사를 의지하고 섬기도록 유도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똑같은 악한 사상에 빠져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버리십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못했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과연 어떤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찾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사상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행위를 자랑하며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닌지, 교회에 와서 내 신앙생활을 나타내고 과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나와야 합니다.

레위인 제사장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넘어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복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살아간다면 버리시고 심판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있는지 살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로 살아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