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멸망 (사 66:22-24)

990502171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의 뜻에 따라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속에 스며 들어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는 세상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자기의 실력을 믿게 되거나 '재수가 없어서 그랬다'는 식으로 나쁜 일은 우연으로 돌려버리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살아 계시고, 일주일에 한번 예배당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되어지는 일 하나하나를 우연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도 숨을 쉬면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고, 직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역시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다면, 아마 그러한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로서 마지막 시간인 이사야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면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사야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이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가서 담대하게 그들의 죄악을 외칠 수 있도록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사야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외쳐졌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외쳐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서 일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 하나가 선포되어지는 것까지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자가 바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이며, 그러한 신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변을 돌아볼 때, 또 우리 자신을 졸아볼 때, 그리고 세상을 둘러 볼 때 하나님은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며, 두 손놓고 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향해서 일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고 가슴 깊이 받아들일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 하나하나가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외치고 있는 말입니다. 22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기존의 세상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들 앞에 있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의 문제는 재미있는 영화 한편 보는 것보다도 못할 정도로 인기 없는 얘기로 전락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이야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고 진행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옛날에는 이사야가 선택되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자기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보이는 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도 틀림없이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이 구원과 멸망의 얘기로 마쳐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이스라엘의 죄는 멸망 받을 죄이고, 행여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죄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이 멸망당할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시대에 일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이 시대에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 한번 이사야서를 통해서 멸망 받을 모습이 어떤 것이고, 과연 우리들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22절에서 말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항상 있을 자는 누구이며, 24절에서 말한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불이 꺼지지 않을 곳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살아가야 할 패역한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사야 전체를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였고, 이러한 이스라엘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절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양육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을 양육하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왔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3절에서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며 수많은 이방인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돈이 있어서 돈 때문에 살아온 것이 아니며, 공부를 잘해서 똑똑해서 그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그들의 군사력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돈이 있고 세상의 여러 가지의 것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오직 은혜만 노래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들을 양육하신 주인을 아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은혜로 산다'는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풍족함에 빠져서 더 많은 풍족과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돈을 구하고 세상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는 은혜가 아닌 돈이 자리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이 자리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제사나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와 제물이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를 고백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마음은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고 의식을 지켰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 것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마음인가? 는 전혀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예배 드렸습니다' '하나님 헌금했습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의식하고,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의식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식과 바치는 것을 모두 거부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에서 풍요해지고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에서 벗어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배가 불러지니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세상이 더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사치와 방탕과 호화로움에 대해서 지적하기 위해 이사야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됩니다. 6: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을 하고 다니는데, 그 모두가 가짜라는 것은,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는 자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되고 내가 곧 망할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사야가 이스라엘로 가서 할 일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을 알게 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로 더러움과 부정함으로 가득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할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가서 말씀을 외친다고 해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6:9,10).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를 위해서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6:13).

이사야는 가장 먼저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뜻을 가진 스알야숩이라는 아들을 데리고 아하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말합니다. 즉 세상의 힘을 믿고 있던 아하스에게 세상은 망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가 장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장차 주어질 이 나라에 포함될 백성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가 될 것임을 말합니다(9:1,2). 그리고 9:6,7을 보면 장차 세상은 임마누엘로 오신 한 아기가 중심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남은 자란 임마누엘로 나신 아기를 왕으로 복종하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로 오신 분에 의해서 통치되어집니다. 힘으로 유지하는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배부름에 빠지지 말고 임마누엘로 오신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뒤에 이어서 이방 나라에 대한 경고를 하십니다. 그 내용이 40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결국 세상에 남아있을 민족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포함될 자가 발생하는 데, 그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이스라엘입니다.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고, 또 44:1절에서도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곱아,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새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로 모집되는 백성이 곧 남은 자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임마누엘로 오신 메시야에 의해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고, 이 나라만 남기고 나머지 세상은 모두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나라에 포함될 남은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남은 자가 누구냐라고 할 때 '너냐?' '나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남은 자의 모습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남은 자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자의 모습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에 포함된 남은 자라면 분명히 자신을 다스리는 목자를 알아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그 목자를 구세주로 삼고 목자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53:2절에 보면 목자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절에서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합니다.

즉 힘있고 흠모할 만한 모습을 가진 자를 목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누르면 눌리는 그런 모습의 목자를 목자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자를 외모로 보지 않고 세상의 힘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그것으로 목자를 나의 목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신부로 간주해서 새로운 예루살렘에 넣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61:10).

연한 순같고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이 오신 목자를 목자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시각에서 떠난 자입니다. 이러한 눈이 뜨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에 대해서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를 찾을 때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창에 찔림 받고 수치를 당하고 죽으신 목자가 눈에 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와 남은 자입니다. 심판을 피할 자들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속에서 새 예루살렘에 포함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 같은 세상만 눈에 들어오지만, 목자를 제대로 만난 자는 세상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에 두고 살뿐입니다.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자신의 부정함과 더러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임마누엘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자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돈 때문에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때문에 세상은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멸망할 세상을 보지 마시고 그 세상 위에 존재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