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피할 곳 (사 8:9-15)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유다 왕인 아하스가 북쪽 이스라엘이 아람과 동맹해서 유다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걱정마라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말고 낙심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행동한다고 해도 그 모든 도모는 다 여호와의 손에 있으니까 걱정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척하지만 사실 아하스는 이미 다른 믿을만한 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6:6절부터 보면 아하스는 이미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국을 상대하기 위해서 강대국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아하스에게는 이미 하나님 말고 다른 믿을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앗수르가 더 믿음직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앗수르만 도와준다면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직한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놨는데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하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앗수르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이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기의 계획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만만의 대비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우리는 그 말씀을 틀렸다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에 자기를 맡기고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중함보다는 세상에서 힘을 소유하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에 말씀은 맞는데도 그 말씀에 자기를 맡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가 더 급한 문제로 되어 있고, 더 큰 관심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는가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말씀으로 지시하시느냐에 대해서는 아예 눈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마치 아하스같이 이런 일에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런 일에는 저렇게 대처한다는 우리들의 계획이 우리들이 원하는 쪽으로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말에도 안심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찾아가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는 말로 권면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본인조차도 그런 믿음이 없지만 어쨌든 그런 권유를 했을 때 대개의 반응은 '예 그래야죠'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속마음에는 다른 해결책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기도하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돈 좀 빌려드릴께요'라는 말이 더 귀에 솔깃하고 힘이 되는 말일 것입니다.

아하스도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격 앞에서는 하나님을 힘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인 아하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 말에도 징조는 필요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도 힘이 될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부유한 것입니다. 마음이 부유하기 때문에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가지고도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포기할때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이 힘으로 여기는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도 아하스가 의지하는 앗수르로 하여금 도리어 아하스를 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장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속히 망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유다가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합니다. 실로아 물이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작은 개울물을 말합니다. 그들은 작은 개울물은 버리고 반대로 차고 넘치는 하수, 즉 앗수르가 위치한 유브라데 강을 더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즉 아하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단지 자기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큰 강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하스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살면서 세상의 좋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 한적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을 소홀히 생각했기 때문에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앗수르가 부러웠던 것입니다. 생명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지는 생명을 하찮게 여겨버릴 때 생명없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해버릴 세상을 부러워하고, 멸망에 빠질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앗수를 불러다가 유다를 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심판과 함께 나타납니다. 심판하심으로 남은 자를 가려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재난이 있고, 경제가 흔들리고, 정국이 위태롭다고 해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속에서 하나님을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놀라서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모르는 자들이니까 너희는 그들과 똑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안에서 사는 자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변함없이 예수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예수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안과 염려와 낙심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의 뒤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라"고 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안에 있느냐 예수밖에 있느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도움자가 될 수 없습니다. 19절에 보면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고 합니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고, 죽어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살아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고백하고, 살아계시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죽어있는 세상을 의지하고, 멸망받을 세상의 힘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죽어있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피할 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모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에만 겨우 기억하는 말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곧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떡을 힘으로 삼는 자들은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세상의 떡보다도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워도 힘든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모습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