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기 (사 9:1-7)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은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삽니까 아니면 전혀 희망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까.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산다는것은 세상이 달라지면 나도 뭔가 편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세상은 이제 틀렸으니까 다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은 이제 틀렸으니까 다 포기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 가지는 태도이고,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세상은 희망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을 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신자가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단지 나중에 죽었을 때 가게 되는 좋은 나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이제 좋은 나라가 될 희망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나라에 희망을 두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심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세상은 희망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희망을 두고 천국에도 희망을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상한 천국이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천국은 아닙니다.

입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세상에서 조금 잘살면 뭐하고, 조금 못살면 또 뭐합니까?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입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나라는 없애버리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새로운 나라로 교체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당연히 새롭게 교체될 새로운 나라에 관심이 가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관심은 세상에 두고 있으면서도 과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발 좀 달라져가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면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연히 과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며 살아가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현재가 과거보다 안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는 아무리 그리워 해봐야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그리워 하다보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면서 '나도 옛날에는 예뻤는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라고 하면서 지금 쭈구렁 할머니가 되어 있는 모습에 서글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옛날을 그리워 해봐야 아무런 쓸데없는 짓입니다. 결국 지금 몸은 늙었지만 아직도 그 마음에는 세상을 잊지 못하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욕심은 있는데 몸은 그 욕심을 이루어줄 가망성이 없으니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늙어도, 병이 들어도 천국이라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까 여전히 세상 속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가 천국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기대할 것이 뭐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2절에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아하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하스는 현재의 위기에 대해서 이미 자기 스스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자기 지혜로 살려고 하고, 자기를 위해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온통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뇌물을 주고받고, 분쟁하고 살인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힘없고 약한 자들은 무시당하고 고통 당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가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외곽지역에서 거주하는 자로서 이스라엘로부터는 소외당하고 이방취급을 받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영화는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것입니다. 빛의 시작이 유다가 아니라 이방취급받는 지역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유다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살아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의 힘을 의지하고, 힘있는 자에게 굽실거리고, 힘있는 자의 도움을 구하면서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그런 나라는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세상의 힘만이 자기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거움과 행복은 한 아기를 통해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고 말합니다. 한 아기를 통해서 즐거움과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빛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에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별볼일 없는 곳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스불론이나 납달리나 갈릴리는 하찮은 동네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희망도 없고,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은 한 아기로 오신 그리스도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천국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내 기대를 성취해 줄 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만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기대를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주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십자가의 정신대로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랄 성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바랄 성공도 이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면서 남을 위해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되는 것을 배우는 것을 기뻐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산다면 결국 우리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어둠의 세상이 같이 어둠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신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빛이란 세상에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둠의 사람들과 같이 어둠으로 살아가지 말고 빛으로 오신 한 아기를 바라보면서 빛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