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손 (사 9:8-12)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 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지금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서 아하스가 자기 나름대로 방비책을 세워 놓고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사람이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을 힘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한 아기에 대해서 말했는데, 하나님은 세상 나라는 버리시고 다른 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 나라말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분을 아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아이는 아주 특별한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겉모습이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에서 이 아이를 비유하고 있는 말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름보다는 별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름이 이렇게 많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별명은 그 사람의 특이한 면을 담아서 그것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눈이 큰 사람을 보고 '왕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왕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이 눈이 큰가 보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고(기묘자), 세상의 앞일을 다 아시는 분이고(모사),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고, 평강을 다스리는 평강의 왕이라고 하십니다.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은 이와 같은 능력으로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그 능력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굳이 예수님을 한 아기로 표현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영원히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아기로 계신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할 때에도 예수님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메시야라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한 아이라고 부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로 태어났으니까 아이라고 부르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절에 나오는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다'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한 아이라고 지칭한데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이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한 아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보시고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배후에 있는 부모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어린애의 특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절의 미디안의 날입니다.

미디안의 날이 무엇입니까? 미디안의 날은 삿7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7장에는 우리가 너무 잘아는 기드온의 300용사가 나옵니다. 우리들이야 말로는 300용사라고 이름 붙여 부르지만 사실 300명은 그냥 뽑힌 것이지 일당백으로 싸울 수 있는 진짜 힘세 용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즉 그들은 용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있는 군사의 수가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너희에게 붙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만약 군사가 많은 상태에서 전쟁을 해서 이기게 되면 틀림없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기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교만해 질것이니까 숫자를 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은 돌아가라고 해서 남은 사람이 만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명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골라낸 것이 물을 핥아먹은 300명입니다. 이들이 무슨 용사입니까? 용사를 뽑으려면 체격도 좋고 무술도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지 물을 핥아먹었다는 것은 무슨 용사입니까?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들 300명이 들고 나간 무기입니다. 이들은 빈항아리와 나팔을 무기로 들고 나갑니다. 빈항아리 속에는 횃불을 감추었습니다. 전혀 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싸움의 결과는 기드온의 승리입니다. 말도 안된 싸움에서 기드온이 이겼다면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기드온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300명을 뽑은 것입니다. 즉 300명은 너희들 힘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이겼다면 그것은 너희의 힘이 아니라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힘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300명을 뽑은 것 같이 예수님을 아이라고 묘사한 것도 예수님의 나라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기 위함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바라보고 삽니까? 이 땅의 나라가 없어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세상을 점령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립니다. 뭔가 긴장하고, 세상이 망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네가 백날 세상은 망한다고 말해봐라 나는 세상 못버린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장래 일을 말하는 계시의 책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경전 정도로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는 없애버리시고 오직 한 나라, 예수님의 나라만이 존재하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라고 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북쪽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 르신과 동맹을 하고 유다를 침공해 오는 것 때문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방 나라와 손을 잡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착하고 선한데 이방 사람들은 나쁘니까 손잡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방 나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과 손잡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동조한다는 것이 됩니다. 자기들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결국 멸망으로 끌고갈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와 손을 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세상을 힘으로 사는 이방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람과 손을 잡음으로서 세상 나라와 똑같이 세상의 힘을 강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새롭게 세우실 나라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더 힘이 더 좋아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자가 부럽고 나도 그 힘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삽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면 여러분에게서는 그 흔적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언제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든, 어떻게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언제나 관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신자에게서는 모든 일 속에서 항상 주님을 찾고자 하는 흔적이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흔적보다는 세상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흔적이 더 많이 보여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치실 때 뭔가를 깨닫고 세상을 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손잡고 있는 르신을 들어서 그들을 쳐버립니다. 즉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를 모두 버리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놓기를 주저합니다. 세상의 손을 놓으면 살 수 없을 것같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잘라버리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치기도 하고, 부모를 통해서 치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손만 붙잡고 살아가라고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내 손에서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여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배후에서 열심히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 되도록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계속해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없어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습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달라졌습니까? 달라졌다면 달라진 그 흔적은 무엇입니까? 돈버는 일에만 매달리던 내가 조금씩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으로 되어갑니까? 전에는 내 마음대로 내 좋은대로 살면 최고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되어갑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낙심하고 그 일의 해결을 위해서만 날뛰던 내가 이런 일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모든 결과가 하나님께 달렸음을 고백하는 사람으로 되어갑니까? 이것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자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자가 되도록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 편에 서고자 애쓰는 삶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천국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답게 뭔가 다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달라진 것이 없이 그게 그거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을 없어져 버릴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예수님의 나라에서 잘되기를 소망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잡고 날마다 주님을 소망하는 자답게 그 흔적이 보여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