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노 (사 9:13-21)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이사야 9장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멸망을 받아야 할 세상이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아기의 나라, 즉 예수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세상의 죄를 해결하고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환영해야 할 세상은 전혀 그렇지를 못합니다. 구원자로 환영을 해야 할 세상이, 우리를 고통에서 기쁨으로 인도해 주실 분을 환영을 해야 할 세상이,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상합니다. 왜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왜 예수님을 거부할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못박아 죽인 사람들은 옛날 로마군인이고, 유대인들이지 지금 우리들은 아니다. 우린 지금 예수님을 잘믿고 있다.' 이것이 현대 신앙인들의 대부분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 살기 때문에 - 자신은 예수님을 잘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자는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 -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죄인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예수님만의 십자가이지 나의 십자가는 아니며 예수님도 자신의 신앙을 칭찬해주고 그 대가로 복이나 주는 그런 예수님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고방식인 것을 아십니까? 제가하고 싶은 말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아니 훨씬 이전에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고방식이나 지금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나 한치의 다를 바가 없이 동일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아담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봐야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아담의 형상속에서 예수님을 믿을 뿐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평생을 같은 모습의 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너는 예수를 죽였지만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는 믿음이 있는 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동일한 모습입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죄인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인간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라고 하셨다고 해서 '예'하고 순순히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착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이 예수님만 소망하고 사는 인간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의 마지막에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산다면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지는 삶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흔적은 무엇이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흔적, 즉 달라진 삶을 행동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의 흔적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교회 일에 게으르던 사람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거나, 십일조를 안하던 사람이 십일조를 하게 되었다거나, 기도를 안하던 사람이 기도를 한다거나, 또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잘내던 사람이 화를 잘참게 되었다는, 이런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변화의 증거가 아니라 그런 행동들은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히 보여질 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흔적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의 흔적은 오직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흔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나는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말만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나는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죄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를 못박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은 망하고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신자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 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나는 목사다'는 힘, '나는 장로다'는 힘, '나는 권사다'는 힘, '나는 돈이 있다'는 힘, '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런일 저런일 했다'는 힘, 이런 힘들이 보여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자 자연히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만이 있게 될 뿐입니다. 이런 신자가 진짜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로 달라지는 것까지도 나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그렇게 되어졌을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기의 무능을 알아야 왜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나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아기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이유는 10절을 보면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교만이고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들 힘을 믿지 말고 너희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고 있는 나 여호와를 의지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치시면,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에게 힘이 있다. 이까짓 실패야 우리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재물을 의지하고 있는 교만을 치기 위해서 재물을 잃게 하시면 '까짓것 내가 아직 젊고 건강한데 이정도 가지고 낙심할 수 없지. 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끝까지 자기에게 있는 힘과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믿는 아람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고 블레셋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삼켜 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12절 뒤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2절에 한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17절과 21절에서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노는 쉬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손은 여전히 펴져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옛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던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은 악한 세상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열심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구제도하고, 선교, 전도도 열심히 하는 교회는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 당시의 교회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라고 해서, 뭔가 교회다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은석교회가, 또한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든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노가 계속되어진다는 것은 죄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그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죄를 그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이 죄를 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는 여전히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오늘 우리들에게서 여전히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의 힘을 믿는 교만, 완악한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해결책으로 예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라고 합니다. 머리는 장로와 존귀한 자를 비유하고, 꼬리는 선지자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장로가 높고 선지자가 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꼬리는 머리의 뒤를 따라갑니다. 결국 어떤 모습이냐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말하는 사람인데 계시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장로의 눈치를 보면서 장로의 원하는 대로 말하며 따라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가 싫어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장로가 좋아할 말만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말입니다. 자기 생계유지를 위해서, 장로에게 잘못 보여서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염려해서 장로들에게 부딪히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장로는 장로대로 목사가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그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와 장로가 아닌 일반 성도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16절에 보면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같이 망합니다. 잘못 가르치는 것을 듣고 '옳다 옳다 맞다 맞다'하면서 박수치고 좋아하며 따라 다니는 사람들까지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보면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계시가 아닌 것을 계시라고 말하고 있고, 제사장은 제사장직을 권력으로 삼아서 백성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싫어합니다. 옳은 소리를 하고, 참된 진리를 말해주면 그것을 싫어하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참된 계시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게시를 바르게 말한 선지자치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상의 소망을 끊게 하는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귀를 막아 버리고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게 됐는데 그러면 평신도는 억울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런 분에게 제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다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성도가 좋아하니까 목사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소리보다, 칭찬을 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말을 더 반겼던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잘못됨을 알면서도 그것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돼'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비판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비판이 아니라 드러난 잘못을 지적할 뿐입니다. 15,16절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 당시의 교회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잘못을 그대로 말할 뿐인데 그것을 비판이라 하고 싫어하는 것은 결국 현대의 잘못에 함께 동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싸움이 없어야 하고 서로 사랑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형제된 사람들이, 혹 육에 속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십자가 아닌 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발생하는 싸움은 분명히 피해서는 안됩니다. 싸워서는 안되고, 다툼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 때문에 잘못도 그냥 넘기고 입을 다무는 것은 같이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는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 진노에서 살아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한 아기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만 영원히 남고 나머지는 모두 진노 아래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해결책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주님의 희생이 아니면 죽었어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덕분에 살아있는 사람이 뭐 잘났다고 자랑하고 떠들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손해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두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인생에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말씀도 뒤로 제쳐버립니다. 하나님이 힘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는, 목이 곧을 대로 곧아져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진노 아래서 사는 자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고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지 내 계획이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겸손히 알고 주님만 바라보는 자가 삽니다. 우리를 살리는 주님의 십자가에 다스려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