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함 (사 10:1-4)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입장, 또는 자기 시각, 자기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의 판단을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같은 것을 두고서 사람들마다 얘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요즘 한참 시끄러운 정치나 경제문제를 두고 얘기해 봅시다. 요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세상 되어가는 꼴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다 지극히 잘못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잘못됐다고 말은 하면서도 개중에는 여당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있고 야당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사실은 다 각자의 기준과 시각에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같이 식사를 한다고 합시다. 한사람은 맛이 짜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싱겁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짠것입니까? 아니면 싱거운 것입니까? 짤수도 있고 싱거울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자기의 입맛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짠데 다른 사람이 싱겁다고 할 때 싱겁다고 한 그 사람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은 '건강에도 안좋은데 좀 싱겁게 먹어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자기 입맛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겐 짠데 싱겁다고 말한 그 사람이 잘못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결국 맛이 싱거운 사람에게는 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한 죄수가 '무슨 죄로 들어왔느냐?'고 묻자 '나는 죄가 없다.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죄수는 '이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치고 죄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합니다. 모두가 할말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에도 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 자기들이 저지른 모든 일들의 책임을 공평하지 못한 세상 탓으로 돌렸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또 뭐라고 합니까? 10.26이나 광주사태 등 모든 것을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일념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야 그들이 한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 잘못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한다면 결국 스스로 오류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오류냐면 다수와 소수의 차이입니다. 약자와 강자의 차이입니다. 다수, 또는 강자는 다 옳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소수, 약자는 옳지 않고 잘못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장으로도, 우리의 기준으로도, 다수라는 숫자의 힘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의 방식은 다수의 의견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다수가 힘이 됩니다. 다수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 당의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는 옳고 공산주의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사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얼마든지 독재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정치 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기편을 들어주는 숫자만 많으면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옳고 그른 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기준으로 사는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돈많은 사람들이 비싼 물건을 마구 사는 것을 보고는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욕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부자가 부자를 욕합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자기 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자들이 하는 모습들을 욕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돈쓰면서 사는 것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내 돈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당신들이 피서 가고 놀 때 나는 땀흘리며 일해서 이만한 돈 벌었다 그 돈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데 웬 참견이냐'는 말에는 사실 할말없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돈버는데 보태준 것 없잖습니까? 사실 부자들 욕하는 그런 사람들도 돈이 없어서 못쓰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들과 똑같이 하면서 살 것입니다. 결국 나는 하지 못하는 것을 남들은 마음대로 하면서 산다는 것이 마음에 안드는 것이지 돈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세상의 잘잘못은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고 나쁘지만 그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고, 우리의 양심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잘못을 기준으로 삼아 가지고 세상을 멸망시킨다면 멸망당하는 사람들은 아마 많은 항의를 할 것입니다. 자기 입장을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금 하나님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은 똑같이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자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은 동일하게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잘못된 세상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 세상이 잘못됐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세상의 잘못된 모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내 기분에 의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세상이 망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9장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면 다른 세상의 나라는 다 사라지고 맙니다. 같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이니까 무조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 나라는 망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9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대로 세상 나라는 자기 힘을 믿는 교만으로 살아갑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고 온통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까지도 거짓으로 가르치고, 욕심 때문에 형제가 서로 먹고 먹히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어떻게든 세상에서 잘살아 보겠다고 하나님도 관심 없고, 말씀도 관심 없고, 오직 돈에 정신 팔려서 살아가는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돈에 정신 팔려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씀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 가는데 필요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잘못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원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잘못된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불의한 법령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입니다. 불의한 법령이란 어떤 법을 말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 노동자들은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한 노동법을 악법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 불의한 법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데모하고 파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법을 통과한 정부는 어떻습니까? 노동법을 악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부에서는 노동법을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노동법이 국가를 위한 선한 법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악법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입니까?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서로 자기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동법이 어떤 법인지 잘모릅니다. 다만 정리해고제라는 것은 들었습니다. 회사의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울 때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사원을 마음대로 줄일 수 있다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회사의 경쟁력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불리한 법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회사를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는 불의라는 것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해로우면 다 불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불리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는데 나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무조건 불의한 것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불의한 것으로 보십니까? 1절을 보면 불의한 법령 때문에 누군가가 억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가련한 백성, 고아 과부들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법령 때문에 돈없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백성들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서 든든한 힘이 없어서 남이 누르는 대로 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설움을 다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억울함을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의는 한마디로 약자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에 여인의 사치에 대해서 얘기할 때 사치라는 것은 단지 돈을 많이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입장, 자기 기준이 있는데 도대체 얼마를 써야 사치가 되는지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사치의 판단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약자입니다.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가련한 백성들이 있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죽어버리고, 부모가 죽어버립니다. 한순간에 세상의 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에게 억눌림을 당해도 대신 나서서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 편에 서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후견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고엘사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약자를 실제로 고아나 과부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은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된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신다는 얘기가 되어버립니다. 지금은 과부라고 해도 돈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진실된 약자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약자를 있게 하신 것은 그 약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모습을 깨우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학대받고, 눌림 받고, 고통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이 바뀌고 형편이 나아지면 자신의 옛모습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가련한 백성이 있게 합니다. 그 의도는 가련한 백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예전에는 자신들도 저런 가련한 모습이었는데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가련한 백성을 바라보면서 저 가련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절대 자기보다 가련하고 약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내 백성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보다 힘없는 자를 무시한다는 것은 현재 자신이 누구의 은혜로 살아가는가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불의로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라서 불의한 법령이라는 것도 약자가 무시당하고, 손해받고, 눌림 당하게 되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불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시고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내 백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약자임을 아는 자입니다. 말로만 '나는 약자다'라고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들 주위에 여러분보다 세상적으로 못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약자를 있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네가 진심으로 약자임을 아는지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기가 약자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자기가 약자임을 알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힘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아 가지고 약자를 무시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보다 여러모로 못나고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있게 하신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여러분에게 낮아지는 마음을 가르쳐줄 스승입니다. 약자를 무시하는 것, 이것이 불의함입니다. 이 불의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불의한 법령은 국가 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을 교회 안에서 만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여서 해외여행을 하기로 하고 돈을 모으기로 했다고 합시다. 거기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돈없는 약자들입니다. 그것이 불의한 법령이 되는 것입니다. 약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가 약자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약자를 무시하는 자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약자를 무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도 약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자기의 약한 모습을 보면서 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 돈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또 돈이 없어도 이미 하나님이 든든한 힘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이 악한 것은 약자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함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약함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