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 1:10-2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여호와의입의말씀이니라"

지난주에 이사야를 시작하면서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한번 말씀 들리 것은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전혀 거리낌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보면 세상에 대하여 너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위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신자로서 당연히 행동해야할 것도 하지 못하고 감추어 버리는 일들이 참으로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된 우리는 선지자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선지자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했던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자기 유익이 기준이 아닙니다. 말씀에 맞으면 좋은 것이고 맞지 않으면 책망하고 나무랬던 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보도 없고 타협도 없이 오직 말씀의 원칙에서 벗어났나 벗어나지 않았나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삶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을 것은 극히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세상의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손익계산을 따지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자신의 종교행위의 게으름을 가지고 말합니다. 즉 성경대로 사는 것을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요즘같이 바쁘고 피곤한 세상에서 새벽기도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경대로 사는 것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1년 52주 동안 주일 오전, 오후,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어려움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사는 것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순종하는 삶의 어려움은 그 결과가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성경대로 살았을 때 하는 일이 잘되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게 되고, 환영을 받는다면 왜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문제는 성경대로 했는데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하고, 반대하고, 공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 대해서 눈치를 보고 산다면 결코 성경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도 초월하고, 세상도 초월하고 모든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가 있지 않으면 선지자 같은 모습은 우리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안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타협도 양보도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공부하면서 그런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시각으로 이스라엘을 볼 때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제사도 제물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눈에는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이 이사야의 시각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직 나라의 부강과 자신의 발전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부강하게 되자 온갖 사치와 타락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도 나라의 부강에 모든 관심을 두고 열심히 일한 결과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여인들의 사치와 타락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제사도 제물도 받지 않고 기도까지 가증한 것으로 여겨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발전시키라는 요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 부강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이스라엘로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그 긍휼과 용서를 보이는 것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피의 정신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보이심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소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단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교회성장이라는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원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것은 용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서 살아난 존재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긍휼과 사랑으로 죽음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것은 용서를 알고 용서를 보이며 살아갈 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 마음속에도 교회에 나오면서 다른 의도가 있고 다른 소원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남겨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을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신 계획입니다. 나 하나의 섬김과 용서를 보이는 삶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구원받고 용서를 배우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세상에 남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직장도 보냄 받은 것이고, 가정도 보냄 받은 것이고, 학교도 보냄 받은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는 용서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할 때 이사야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이 보여야 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뭐라고 했습니까? 17절에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합니다. 나라가 부강하자 자연히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들의 격차가 크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 소위 세상에 힘있는 자들은 고아나 과부 같은 약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보이라는 것은 단지 남을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고아, 과부같이 천대받고 무시 받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약자가 있도록 해서 그 약자를 보면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도록 하시고자 합니다. 즉 약자를 단지 약한 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용서를 보이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약자를 천대했던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를 주홍 같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홍은 곧 피를 의미합니다. 즉 살인을 말하는데 살인이란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남을 억울하게 하고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한다'는 말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약자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살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를 이웃과의 관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보다 약한 자고, 너보다 못한 자라고 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기지 않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너 앞에 있는 약한 자의 모습이 바로 너의 모습인데, 네가 그자를 업신여긴다면 너는 내게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무시한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즉 너도 죄인인데 하나님의 용서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이웃을 그렇게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용서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이웃이 어떤 모습이든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면서 용서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안에서 죄를 가리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를 보이는 삶이며 천국은 이런 신자들이 가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