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 (사 10:20-34)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영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은 도망하도다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찌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찌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맛메나 사람은 피난하며 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하소연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왜 힘든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세상일은 바쁜데 교회 일도 해야 하고 예배에도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닙니까?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해야 하고, 온화한 성품을 보여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겉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문제이지 세상 사람들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느냐에 아주 민감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듣든 신경 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야 저 사람은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고 성격이 참 좋아. 진짜 신자 같애' 이런 말을 들어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많은 신자들이 이런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억지로 온화해지려고 하고, 화를 안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성품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의도적으로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짐이 되고 나아가서는 이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는 늘상 드렸던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신앙생활은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니며 온화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주어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국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고작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예배와 기도, 성경 보는 것을 무시하고 등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게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발견하고,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사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안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늘에서 큰상을 받아보겠다고 노력과 시간과 돈을 쏟아 붇는 신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버리기 힘든 유혹가운데 하나가 나도 뭔가를 해야 안되냐는 생각입니다. 뭔가 안하고 열심을 내지 않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 같고, 신앙이 나태한 것 같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 아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조급하고 기다림이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기만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신앙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조급합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대로 빨리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급해지게 되고 참고 기다리는 모습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에서 힘든 것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흔히 하는 말은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듣는 신자들이 그 말 때문에 힘을 얻고 걱정을 버리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은 맞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언제 도우시느냐는 것입니다. '언제 도우시느냐'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기다린다는 말을 할 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일 것입니다. 재림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만큼 힘들고 갈등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언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약이 없습니다. 기약도 없는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할 때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언제까지'라는 것입니다. 언제라는 것이 있어야 그래도 그 날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재미도 있고 힘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라는 기약도 없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비록 신자된 우리로서는 재림을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기약도 없이 그냥 온다는 약속만 믿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기약도 없는 기다림은 마음에 두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치우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믿음을 한마디로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든 믿음은 기다림이 없이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것입니다.

신자들이 버려야 할 것은 뭐든 지금 당장 이루어지고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자가 기다리는 신앙이 없으면 꼭 자기의 힘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약속 받은 아브라함은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약속도 인간의 조건이 맞아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아들을 낳을 수 없을 정도의 나이가 되버리면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말씀을 듣고는 120년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홍수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말씀만 의지하고 묵묵히,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건 말건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오늘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참고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제가 드릴 말씀은 '참고 기다립시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린 단지 참고 기다리면서 주어지는 환경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어려움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해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누군가로부터 핍박을 받고 욕을 먹습니까?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잠시 잠간의 세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지를 못하고 세상것 때문에 울고 웃고 인상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참고 기다립시다. 분명히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일하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앞의 내용을 다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해서 아하스를 공격합니다. 아하스는 이일 때문에 번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다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하나님을 믿고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의지합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가 징조를 구하라는 것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힘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있었고 그 불신앙이 그들의 삶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힘을 최고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힘으로 세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다를 앗수르를 들어서 심판하시고, 도끼를 든 자 앞에서 자기 힘을 자랑하는 앗수르까지 심판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양쪽을 다 치시는 그 심판 앞에서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말씀합니다. 21절, 22절에 보면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고 합니다. 심판 속에서 남은 자만 돌아옵니다. 그 남은 자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남은 자는 하나님이 하실 일만 바라보고 기다린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급해하지 않고, 어렵다고 해서 기약 없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겠지'하면서 묵묵히 참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남은 자가 누구냐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24절부터 보면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대리고 몽둥이로 친다고 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자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겠지'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미디안을 하나님께서 평민이었던 기드온을 들어서 심판하신 일이 나옵니다. 또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먹었던 애굽은 홍해에서 몰살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심판할 것이다'는 사실을 옛사건을 들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심판하고 애굽을 심판한 것같이 앗수르도 내가 심판한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내가 심판할 때만 기다려라'는 의미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라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려라고만 하실 뿐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것을 힘들어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앞의 일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남은 자는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사십시오.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사십시오. 그 자가 바로 마지막때 남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