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의 줄기 (사 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왔다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들의 생각과 항상 일치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언제나 우리들의 상식과 일치되는 것들이었는데 막상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머리에 박혀 있던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이 무너져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상식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이유는 관심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세상의 문제에는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부터 기존의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상식과 전혀 다릅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상식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의 세상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와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입장에서의 상식이지 하나님 편에서의 상식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을 위해서 창조되어 졌습니다.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더러 피조물인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쓰여지는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신자들은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하면서도 창조주더러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거부하게 되고 결국 여전히 자기의 뜻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종은 복종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참된 하나님의 뜻은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복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굽히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이 말씀을 듣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세상에서의 삶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앞에 나의 뜻을 굽히겠다는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계획은 세상의 더러운 것은 다 멸하시고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때에 남을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깨끗한 사람이란 양심 바르고, 뇌물 안받고, 거짓말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의 모습과 구별돼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이어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면,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세상의 모습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어떤 자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은, 더러운 것은 다 쓸어버리고 그 중에서 깨끗한 것만을 골라서 남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죄가운데서 모든 것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남겨놓으실만한 깨끗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때 남겨놓으실 깨끗한 것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병든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나무가 뿌리는 성한데 가지가 병이 들었다면 가지만 잘라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뿌리까지 병이 들어서 도저히 고치지 못할 상태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든 나무는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깨끗한 나무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뿌리까지 썩어버린 상태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 깨끗한 나무를 심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한 인물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성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지막때 남을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에 합당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뭔가 위대한 일을 했다는 기사도 없습니다. 유명한 것으로 치자면 이새보다는 다윗이 더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새의 줄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이 난다는 이야기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면 '이새의 줄기'라는 말보다는 '다윗의 줄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새의 줄기이든, 다윗의 자손이든 이 의미들이 혈통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새의 줄기라는 것도 이새의 계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새의 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새 당시의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새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다윗은 아주 어린아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새나 다윗이나 세상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하면 생각나는 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골리앗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 왕다운 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꼼짝못하는 사울은 결국 왕다운 왕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골리앗 앞에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세상 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불신앙을 드러내십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 때문에 힘을 얻어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별볼일 없는 다윗을 택하셔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메시야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다스려지고 힘있는 자가 우대 받고, 힘이 없는 자는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런 세상은 마지막때 뽑히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세상 방식 그대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힘을 원하고 힘을 가지기 위해서 힘썼던 교회 아닌 교회도 다 뽑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궁이에 던져 넣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나라입니다.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변변치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나라입니다.

마지막 때 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만 경외하며 살았던 신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과 일치하는 신자입니다. 골리앗 같은 세상의 힘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힘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자는 힘에 굴복치 않고 오직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감으로 세상이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힘이 없음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는 뭐가 없다고 해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세상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 힘이 약함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힘을 믿고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뽑히고,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이 남은 자로서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