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를 부르심 (사 11:10-16)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 시키시리라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면, 즉 성령이 함께 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말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에게는 계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가 전달되어져도 계시를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올 때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도로 나와야 그 말씀이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로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즉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그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잘되게 하는 복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라고 할 때 그 말씀을 이해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골치 아프고 지루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천국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점검할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입니다. 스스로 물으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을 기호로 삼아서 남은 자들이 각처에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기호로 삼는다는 것은 신호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이 신호가 되가지고 각처에 흩어져 있던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10:21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은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에도 남은 자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남은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0:24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앗수르가 애굽같이 너희를 치고 때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을 치듯, 애굽 사람을 치듯 앗수르를 멸하실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거민들이 주위의 나라와 먼바다의 섬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망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방 각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을 모으시는데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 원수를 갚아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하신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은 비록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고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존재한다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사람 아닌 성도들은 뭡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나라 선택과 개인 선택, 이렇게 두가지가 있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려면 유대인이 회개하나 안하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애굽에게 열번째 재앙으로 장자 죽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조건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만이 살아난 것입니다. 제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믿는자들로서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던 것도 이스라엘에게는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희생이 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안다면 자기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린양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그 피의 은혜만을 감사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삶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첫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도 단순한 헌물, 또는 십일조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의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가나안 땅은 그들을 토해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좇아 다니는 자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다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로 이 자리에 나오셨다면 우리는 다른데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관심 두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수없이 말하는데 모두가 나를 잘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은혜이고 사랑이지 나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는 돈보다도, 자식의 출세보다도, 직장보다도, 사업보다도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보다, 은혜보다 세상의 풍족함이 더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통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자리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한들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리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친들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이미 그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부요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갈급함이 있을 리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문밖에 세워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사랑이 없이는 한순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아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아니면 은혜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찬 채 부요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요함은 은혜와 사랑이지 결코 세상의 것으로 부요함을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신호가 되가지고 앗수르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는 것입니다. 앗수르 때문에 주위 여러 나라로 피신한 사람들이 앗수르가 멸망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럴 때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살면서도 그 나라의 풍족함과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땅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이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살 때에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던 그 마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와 같은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에서 남은 자란 어떤 자를 가리킵니까? 비록 앗수르에 의해서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지만 언제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은혜의 땅을 소망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오라고 할 때 주저없이 살던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살던 곳에 미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재미에 빠져서 은혜도 사랑도 다 잊어버린 사람들은 아무리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더 재미있기 때문에 돌아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라고 할 때 두말없이 기쁨으로 돌아갈 남은 자란 어떤 자이겠습니까?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재미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혈통을 가지고 이스라엘 행세를 한 사람들과 같이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예배당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있다고 해서 성도 행세하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이미 모든 관심은 세상에 있고 돈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아무리 내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들은 척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남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요즘 현대교인들은 바쁘다는 것을 최고의 변명거리로 삼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에 소홀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바쁘고 싶어서 바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바쁜 것을 애타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들이 없습니다. 이미 돈버는 것이 목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이 천국에 오라고 하실 때도 바빠서 못가겠다는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기 때문에 성도의 모임에 빠지게 되고, 교회의 여러 일들에 소홀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빠져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던 롯의 아내가 무엇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그 좋은 세상을 내버려두고 떠나기가 아쉬웠던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바로 롯의 아내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세상을 떠나기 싫어하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은자, 참된 이스라엘은 비록 몸은 세상을 살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득차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 죄가 싫고 죄가 없는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리가 최고의 기쁨일 것입니다. 언제든지 손털고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세상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힘쓰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신자가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기뻐하며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