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심판 (사 13:6-1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피곤하며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만나는 자는 창에 찔리겠고 잡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겠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 목전에 메어침을 입겠고 그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잊어서는 안될 부분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멸망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신자는 인생의 전체를 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이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가 살아남느냐가 관심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마지막때 심판받을 자가 누구이고 살아남을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 도구로 사용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다시 심판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바로 오늘의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와 동일합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죄는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죄를 알면 사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11절을 보면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바벨론이라는 한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죄가 곧 온 세상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을 들어서 세상의 죄와 심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말합니까? 11절은 바벨론의 교만과 오만과 거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만, 오만, 거만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표현을 이렇게 각각 사용하는 것은 바벨론의 죄가 어떤 것임을 강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 1: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를 말하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세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오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만을 얼마나 비중 있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만은 곧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만이나 교만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상식과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세상이 생각하는 교만과 다릅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이해해 버리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지막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이 교만 때문이라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겸손은 잘난 척 안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많이 배웠다고 거들먹 거리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교만과 겸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교만을 알기 위해서 예전에 설교했던 다니엘서를 다시 보겠습니다. 단 4:3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힘과 능력에 대해서 감탄을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드리면서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실제로 그것을 겪으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늘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계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자기 뜻대로 행하셔서 바벨론이 부강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되어진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위에서 자기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교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모두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세상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지만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바벨론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평소에 사랑했던 것을 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마지막 때를 사는 신자가 할 일을 그것을 부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자가 바로 마지막때 사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