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자의 노래 (사 14:1-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를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를 주관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 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도 너로 인하여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뜨리웠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작벌할 자 없다 하는도다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것에 붙들려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것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힘없고 가난하고 나약한 것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이 자기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아가는 소위 갑부가 있고,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 하나님에게 돈좀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갑부는 신자를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마 하나님도 별 것 아니다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저렇게 약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갑부의 눈에는 하나님이 겨우 돈이나 몇 푼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신자도 믿음도 시시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얘기했던 바벨론의 교만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이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것들을 보니까 모두가 자기들에게 얼마든지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겨우 그런 것이라면 나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그릇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있고,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판단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고 '나도 가져 봤으면' '나도 저렇게 돼봤으면'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군침을 흘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신자 스스로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보고 싶다고 해서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별 것 아니고, 우습게 보여지게 되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천하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것,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것은 자연히 우습게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주 주고도 살 수 없고 세상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세상 것에 대해서 부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 아니겠습니까? 영생을 어디에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영생의 가치를 알고 또 영생에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면서 살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세상의 것은 썩어지고 마지막 때 불에 타서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신자가 그 말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을 알고 영생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자연히 희미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구했을 때 진주를 자기의 소유로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재산보다도 진주가 더 가치가 나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장사꾼에게는 자기의 재산보다도 진주가 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전재산을 없앨 만큼 진주가 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사꾼은 진주를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구원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왜 여러분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치 없는 세상 것 때문에 고민하고 한탄하고 한숨으로 지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결국 영생은 세상것 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외의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제아무리 누가 돈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우습게 여겨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신자는 세상의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겸손이라고 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없이도 내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세워두고 그 목적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결과로 얻어진 모든 열매들을 마지막 때 다 부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3장, 14장은 이러한 교만을 드러낸 바벨론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님은 야곱을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이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드러내며 교만한 족속은 다 멸해버리시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야곱 족속만큼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야곱 족속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의 자리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쫓겨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심판 당할 때 누가 살아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겸손히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긍휼이 여기심입니다. 다같이 심판에 들어가야 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느냐를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사람은 교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긍휼 하심 때문에 주어졌음을 아는 자가 어떻게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가 곧 은혜를 알고 긍휼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희는 잃어버린 바 된 경험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찾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는 자기를 찾으신 하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지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을 비유함)보다는 잃어버린 바 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죄인 하나를 찾으신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지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신자가 어떨 때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한 선한 종교 행위를 떠올릴 때입니다.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한 종교 행위에 의를 두게 될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의가 드러나지 죄인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신자가 뭔가 했다는 것들이 죄인 됨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은혜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우습게 보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3-11절까지는 돌아온 자가 부르는 노래인데, 그 노래는 힘을 자랑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향해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