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성 (사 14:12-20)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열방의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네가 자기 땅을 망케 하였고 자기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일반으로 안장함을 얻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하리로다"

지난 시간에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이것은 신자인 우리가 얼마만큼 세상에서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간다면 과연 무엇을 통해서 신자만이 보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우습게 보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지 내가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세상이 우습게 보여집니까?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귀한 것을 소유했을 때입니다. 결국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은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자들에게서만 자연히 보여질 수 있는 신자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신자들이 세상을 어느 정도 우습게 보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돌아온 자가 바벨론을 향하여 지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3-20절까지가 바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가만히 보면 한마디로 '잘난척 하더니 꼴좋다'는 식의 내용입니다. 돈있고, 힘있고, 세상에서 높다고 위세부리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살더니 지금 네 꼴이 뭐냐는 식입니다.

바벨론이 어느 정도까지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11절에 보면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라고 합니다. 또 15절을 보면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이 마지막에 당할 모습입니다.

바벨론이 왜 이렇게 된다고 했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이 그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자기의 수중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벨론을 배우면서, 그리고 바벨론의 마지막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 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계명성이라는 것은 새벽별을 의미하는데 새벽에 아주 빛나는 별을 가리킵니다. 즉 계명성의 의미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아주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고 주목을 받을 만한, 한마디로 세상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성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높은 자같이 교만하고 하나님도 무시하고 힘을 자랑하더니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비참하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그런 의미의 말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고 자기 힘을 내세운 자는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잘난 인간 되어봐야 그것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목사님, 신자는 다 가난해야 하고 출세하면 안됩니까?" 물론 아닙니다. 신자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의 것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신자라면 돈이 있어도 없는 자로 살아갈 것이고, 높은 지위에 앉아 있어도 낮은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고 힘없는 사람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겸손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구원을 아는 신자라면 항상 긍휼을 노래하고 긍휼을 내세웁니다. '하나님 나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때문에 천국가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신자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은혜를 고백하고 긍휼을 노래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틀림없이 겸손만 보여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쌍한 사람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죄인을 말하는데 죄인이 안보이고, 긍휼을 말하는데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신앙이 좋은 사람만 몰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는 것같이 죄인이 예수님을 찾게 되어 있는데 죄인도 아니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 것입니까?

교회가 타락해 가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죄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희미하고 속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교회가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죄인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모두 음부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세상에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이 음부의 밑바닥인 사람들이 뭐 그리 부럽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에서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습니까? 잘난 자식을 둔 부모가 부럽습니까?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교만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항상 교만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교만이 일어날 형편과 조건이 되지 못하니까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형편과 조건이 충족되면 교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비록 교만이 안보인다고 해도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계명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마지막은 지옥의 맨 밑바닥입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세상의 것이 없다면 그것으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만약 여러분에게 인간이 자랑하고 내세우고 잘난척할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겸손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란 차라리 세상 것이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적절하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계명성같이 우러러 보이는 자리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교만해지는 자리이고, 멸망의 자리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겸손한 자리에서 날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십자가를 붙드는 지혜 있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